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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화 Oct 18. 2024

배움은 마음에 남아

6. 나선 계단을 오르며(14)

“방금 진우가 굉장히 인상적으로 얘기했는데, 정말 그게 맞아요. 어떤 행동에 의미를 부여하겠다고 생각하면 마음은 정말로 그렇게 인식하거든요. 지금 우리가 한 게 마침표일수도 있고, 쉼표일 수도 있겠죠. 무엇이건 간에 이제 다음으로 넘어가도 되는 거예요. 여러분 각자에게 다른 의미였겠지만 그런 쉼의 공간이 되었다면 저는 더할 나위 없이 기쁠 겁니다.”

“공방 이름하고 닮은 철학이에요.”


윤소은의 부연에 최현욱이 잠깐 미간을 모았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네, 정말 그렇네요. 여러분, 정말 감사했습니다. 제가 더 많이 배웠고, 더 즐거웠던 것 같아요.”


수그린 그의 고개 위로, 누군가 먼저 시작했을지 모를 박수 소리가 쏟아졌다. 최현욱은 지금 그가 느끼는 감정의 이름은 몰라도, 그 감정의 형태는 알 것도 같다고 생각했다. 동그랗고 매끄럽고, 제법 묵직한 자갈들이 달그락달그락 소리를 내며 마음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


“출석번호순으로 발표 시작해 줄래요?”


앞으로 나와 자료를 화면에 띄운 첫 번째 학생이 누가 들어도 잔뜩 긴장한 목소리로 발표를 시작했다.


“제가 보여드릴 환경 보호 프로젝트의 주요 컨셉은 대기질이 보호되는 청정도시입니다…”


첫 번째 순서이니만큼 단단히 준비했는지 다소 떨리는 모습이긴 했어도 제가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또렷하게 말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윤소은은 문득 그 학생의 모습에서 이진우를 떠올리고는 저도 모르게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사적인 대화를 깊게 나누어 볼 기회가 없었던 학생이었어도 이젠 제법 잘 안다고 말할 수 있을 성싶은 사람과 닮은 부분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 퍽 즐거웠다.


대략 5분간의 발표가 끝나고 다른 학생들은 물론이고 윤소은도 박수를 보냈다. 전형적인 모범생다운 발표여서 안정적이고 익숙했다. 가볍게 펜 끝으로 클립 바인더를 두드리며 다음 발표를 기다리던 윤소은은 갑자기 벽을 탕탕 두드리며 시끄럽게 구는 소리에 잠시 미간을 찡그렸다. 일회용 플라스틱 테이크아웃 컵으로 벽을 두들기던 남학생이 씩 웃으며 말했다.


“혹시 오늘 아침에 플라스틱 컵으로 커피 마신 사람?”


몇 명이 손을 들자 그는 진지한 표정을 짓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공범이네. 다 같이 지구를 망친 아침에 대해 잠시 속죄의 시간을 가집시다!”


윤소은이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 가끔 이런 학생이 있긴 했다. 화면에 제가 그린 듯한 플라스틱 괴물이 등장하는 네 컷 만화를 띄운 학생이 신나게 레이저 포인터를 휘두르며 발표를 이어가는 동안 윤소은은 곰곰 생각에 잠겼다.


‘모두 다 세상을 각자의 방식으로 민감하게 느끼고 받아들이시고 계시니까요. 받아들일 수 있는 것들은 아마 다 여러분의 개성으로 녹아들었을 거예요.’


새삼스레 최현욱의 말이 떠올랐다. 학생들도 그럴 것이다. 개성이란 것이 천편일률적인 기준으로 평가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이런 형식의 발표면 또 뭐 어떤가. 답을 찾아나가기 위해 이런저런 시도를 한다는 것이 중요한 것 아니겠는가. 스스로 납득한 윤소은이 신나서 떠들어대던 남학생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이게 우리가 만든 괴물입니다. 플라스틱 괴물! 얘가 몸집을 부풀려서 인간을 다 잡아먹는 게 빠를까, 우리가 통제 가능한 수준 이상으로 덩치를 키우지 않게끔 신경 쓰는 게 빠를까? 답은 나도 모르죠. 여러분에게 묻겠어요, 여러분이 생각하는 답은 뭔가요?”


속사포처럼 쏘아낸 남학생이 두 팔을 활짝 벌려 머리 위로 들어 올리자마자 열광적인 환호가 터져 나왔다. 선생 체면에 폭소할 수는 없어서 힘겹게 웃음을 참고 있던 윤소은이 혼잣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래, 내게 최적화된 답은 내게 있지.


***


“괜찮아, 엄마. 그냥 천천히 말해도 되고 실수해도 돼. 그런 게 더 재밌어, 원래.”


삼각대에 세워둔 휴대폰 카메라 렌즈를 잠시간 응시하던 나예가 리모컨 버튼을 누르고 신나게 손을 흔들었다.


“엄마가 너무 긴장해서 인트로만 하루종일 찍고 있어요! 백만 번째 인사합니다, 안녕하세요! 오늘은 엄마랑 같이 초코칩 잔뜩 넣은 스콘을 만들 거예요. 엄마, 인사해! 이번엔 실수해도 그냥 킵고잉 할 거야.”


나예의 현란한 인사말에 눈만 껌뻑이던 김은지는 푹 옆구리를 찌르는 손길에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찡그렸다 허둥지둥 어색하게 웃었다. 재녹화는 없다던 나예의 협박이 기억난 덕이었다.


“안녕하세요. 백만…한 번째 인사할 뻔했네요.”

“오, 지금 좀 센스 있으셨어요! 역시 예니 엄마!”


제가 지은 예명을 들이대며 씩 웃은 나예가 팔을 휘저으며 떠벌리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제가 엄마랑 이런 걸 왜 찍냐면요, 엄마가 말하고 싶은 게 많았어요. 우리 엄마는 할 줄 아는 것도 되게 많고, 좋아하는 것도 엄청 많았는데 예니 엄마로 살면서 많은 걸 잃어버리는 바람에 엄마 자신도 좀 잃었었거든요. 근데 예니는 엄마가 잃어버린 게 뭔지 안단 말이죠. 왜냐면 엄마가 자기를 내주면서 놓친 걸 고스란히 주워 가지고 있었거든요? 그래서…어, 엄마. 울어? 또 울어?... 방송사고네…근데 이거 편집 안 하고, 그냥 올릴 거예요. 왜냐면요…”


나예가 김은지를 설득한 끝에 같이 만들자고 한 베이킹 영상 채널의 첫 번째 영상에는 어설픈 인사말과 나예 말마따나 방송사고 같은 웃지 못할 장면들이 가득 담겼다. 하지만 그 뒤로 올라온 어떤 영상보다도 가장 높은 조회수를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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