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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화 Oct 22. 2024

자꾸자꾸 지평을 넓혀가면

6. 나선 계단을 오르며(15)

“선생님, 클래스 1기 수업 멋지게 마무리하신 기념으로 새로운 도전 어떠세요?”


항상 마시는 것만 마신다고 타박하던 진태하의 말에도 쉽사리 입맛을 바꾸지 못하던 최현욱에게 이로미가 넌지시 권했다.


“아, 그게.”


대뜸 거절은 하지 못하고 최현욱은 곤란하게 웃었다. 늘 그러하듯 카페의 오픈 첫 손님은 이웃의 최현욱이었다. 최근 그의 일을 돕게 된 이진우가 함께 동행한 지도 좀 되었다. 바로 사양은 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모습을 본 이로미가 은근슬쩍 한 번 더 시도했다.


“선생님, 이것도 세계를 넓히는 방식이에요. 클래스도 제가 옆구리 꾸욱 찔러드린 거 아니면 엄두 못 내셨을 거잖아요.”


틀린 말이 아니었다. 아픈 데를 찔린 것처럼 최현욱이 입을 다물었다. 쩔쩔매는 기색이 스멀스멀 퍼져나가는 것을 본 진태하가 이로미를 나무랐다.


“너는, 야. 말을 해도 꼭.”

“아, 왜요. 응원하는 사람만 필요한 거 아니잖아요. 가끔 절벽에서 떠밀어주는 사람도…”


진태하의 험악해지는 얼굴을 본 이로미가 잽싸게 몸을 돌려 가만히 뒤에 서 있던 이진우를 보며 뭐라고 입술을 벙긋거렸다. 야, 너도 빨리 가세해. 기민하게 메시지를 읽어낸 이진우가 허둥지둥 이로미의 역성을 들었다.


“누, 누나가 그래도 되게 도움 되는 말 많이 해주세요!”

“진우 군 지금 협박받았구나.”


이진우가 공방에서 일하기 시작한 뒤로 진태하는 그를 퍽 편하게 대하기 시작했다. 인간관계가 그리 폭넓었다고는 말할 수 없었던 이진우는 처음에는 어색해했어도 금세 제 삶에 자리를 만들기 시작한 타인들을 기껍게 받아들였다. 가끔은 곤혹스러워하기도 했지만.


“아닌데…”

“아니긴 뭐가 아냐. 식은땀 삐질삐질 흘려대는 게 훤히 보이는구만 뭐.”


그러다 말을 뚝 멈춘 진태하는 선반 위에 쭉 진열해 둔 캐니스터를 샅샅이 훑었다. 병 바깥에 붙여둔 라벨을 하나씩 찬찬히 살피더니 하나를 집어 들고 인상을 잔뜩 구긴 채 고민하다가, 또 다른 것을 집어 들고는 두 개를 번갈아 가늠해 보듯 신중히 저울질했다.


“치사해요. 새로운 시도를 해보시라고 권한 건 난데!”


근거 있는 불평에 조금 머쓱해진 진태하가 콧등을 찡그렸다. 그로서도 새치기한 듯한 기분이 없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진태하가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있던 동안 호기심은 어쩔 수 없었는지 라벨을 슬쩍 엿본 이로미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어, 사장님. 근데… 음. 그건 좀 너무 쇼킹하지 않아요?”

“은근히 잘 어울리잖아.”

“바깥에서 백날 어울리고 괜찮은 거라고 말해줘 봤자 무슨 소용이래요. 당사자가 편안하게 느끼는 게 제일이죠?”

“야, 그래도 모험도 필요한 법 아니냐. 그냥 커피 한잔에 뭐 그리 복잡하게…”

“그냥 커피 한자안? 사장님의 커피 철학에 겨우라는 말이 가당키나 해요?”


진태하가 머리를 긁적였다. 어째 사장은 자신인데 상사에게 프로답지 못하다고 훈계받는 기분이었다. 곁에 있던 최현욱과 이진우도 비슷한 것을 느꼈는지 간신히 웃음을 참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최현욱은 알지도 못할 원산지와 원두의 이름이 적힌 라벨을 놓고 진태하와 실랑이를 하던 이로미가 느닷없이 소리쳤다.


“장갑 어딨어요? 찾으니까 왜 안 보이지.”

“갑자기 장갑은 왜 찾냐?”

“결투 신청하려고요.”


생뚱맞은 소리에 황당하게 물든 세 사람의 시선이 순간 교차했다. 간신히 이성을 붙잡고 있는 것 같은 얼굴을 한 진태하가 힘겹게 물었다.


“뭔… 결투?”

“뭐겠어요. 사장님이 고르신 거랑 제가 고른 거, 둘 중 어떤 게 선생님 선택을 받는지 겨뤄보자고요!”

“......”


이로미가 몹시도 진지했기에, 진태하는 비로소 표현 방식은 괴상했어도 그녀가 제 나름의 직업적 자부심을 갖고 한 소리라는 것을 이해했다. 피식 웃어버린 그가 안경을 추켜올리며 바깥을 흘긋 쳐다보았다.


“그래, 손님이 몰릴 시간 되려면 아직 여유 좀 있네. 어때요, 형님. 공정하게 판정하실 거죠?”

“뭘 판정해야 할까요?”


원한 적도 없는 승부의 판정을 내리게 생긴 불운에 최현욱은 한숨을 삼켰다. 이진우는 이 모든 해프닝이 한 편의 라이브 쇼라도 되는 것처럼 눈을 반짝이며 지켜보고 있었다.


“저랑 이 녀석이 각각 한잔씩 내린 걸 한 모금씩 드셔보시고 결정하시면 되는 거죠. 어느 쪽이 더 입맛에 맞으셨는지.”

“사장님, 진지하게 해요. 만약에 선생님이 제가 고른 원두를 더 맘에 들어하시면, 사장님도 인정해 주시는 거예요?”

“뭘?”

“손님들의 취향을 읽어내는 센스요.”


최현욱은 그 말에 잠시 입을 다물었던 진태하의 얼굴에 미소 비슷한 것이 스쳐 지나간 것을 보았다. 제법 도발적인 말이었는데도 그로서는 재미있기만 한 모양이었다.


“그래, 그러지 뭐.”


몇 분 뒤 완전히 집중한 눈으로 커피를 내리던 두 사람의 바리스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최현욱은 마른침을 삼켰다. 이곳에서 습관적으로 아침 커피를 사 간 것이 셀 수 없이 많았어도 핸드드립으로 커피를 내리는 모습을 본 것이 처음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탓이었다. 게다가 늘 능청맞은 진태하나 종종 까불거리는 명랑한 이로미가 이토록 진지한 모습을 보이는 것도 생경했다. 낯설었지만 경외감이 드는 모습이었다.


“우와…”


드립 서버 두 개가 착착 놓이는 것을 구경하던 이진우가 짝짝 손뼉을 쳤다. 그제야 평소의 너스레 떠는 모습으로 돌아온 진태하가 권했다.


“그럼 드셔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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