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나선 계단을 오르며(16)
커피잔을 들어 올리던 최현욱이 멈칫했다. 지금까지 마셔왔던 커피와는 사뭇 다른 향취가 그를 잠시 멈춰 세웠다. 선뜻 입을 대지 않고 있는 최현욱을 보던 이로미가 슬며시 웃으며 말했다.
“독특한 향기가 나죠, 선생님?”
“그러네요. 조금 강렬한 것 같기도 하고.”
흥미진진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들을 일부러 모른 체하며 최현욱이 양쪽 잔의 액체를 번갈아 머금었다. 최현욱의 얼굴에 오묘한 표정이 떠오르는 것을 본 진태하가 팔짱을 끼고 뒷벽에 슬그머니 기댔다.
“이건 굉장히 무겁고… 진하네요. 씁쓸한 맛도 강하고. 근데 뭔가를 깊이 감추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알아가려면 시간이 걸리는 사람처럼…? 근데 이쪽의 커피는 무척 사근사근한 느낌이에요. 제가 마시던 것과 비슷한 것 같으면서 좀 다르긴 한데, 사람으로 치면…”
갑자기 말을 뚝 끊었던 최현욱이 어리둥절하게 커피잔과 앞에 서 있던 사람을 번갈아 보더니 뒷덜미를 긁적거렸다. 그의 입안에서 갈팡질팡하던 말이 결국은 흘러나왔다.
“... 로미 씨랑 닮았는데.”
동시에 이로미와 진태하의 입꼬리가 씰룩이는 것을 본 최현욱이 아하, 하며 주먹을 쥔 손으로 다른 손바닥을 탁 두드렸다.
“그러고 보니 아까 로미 씨가 편안하게 느끼는 게 좋다는 말을 했었는데. 그럼 이쪽이 로미 씨가 추천한 원두인가 봐요. 맞죠?”
“네, 맞아요. 근데 선생님, 어느 쪽이 더 입맛에 맞으시냐는 질문엔 대답 안 하셨는데. 이렇게 회피하시기예요?”
“하하…그런 건 아니에요. 제가 익숙한 걸 좋아하는 사람이다 보니 모험심이 좀 모자라서요. 하지만 좋네요, 이런 식으로 자꾸자꾸 새롭게 시도하게 해 주셔서.”
호기심이 인 듯 커피잔 두 개를 흘끔거리던 이진우가 갑작스레 물었다.
“저도 마셔봐도 돼요? 커피 맛 같은 건 잘 모르지만.”
“당연하지. 왜, 너도 취향 테스트 해 보고 싶어 졌어?”
이로미가 잔 두 개를 새로 꺼내어 서버에서 따라낸 커피를 밀어주었다. 그러면서 한마디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내 생각엔 진우는 이쪽을 더 좋아할 것 같아.”
진태하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선수를 친 이로미가 이진우를 재촉했다.
“얼른 마셔봐, 얼른.”
이번엔 제게 쏠린 관심을 어쩔 줄 몰라하며 이진우는 잔을 들어 조금씩 홀짝였다. 한 번은 심상한 얼굴이었다가, 화들짝 놀라는 표정으로 바뀌는 얼굴을 보며 두 바리스타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이건 못 알아보기가 힘든데.”
“그러게요. 내 말이 맞지, 진우?”
이진우가 놀라움을 감추지 않고 고개를 연신 주억거리며 감탄을 내뱉었다.
“그런 걸 어떻게 알아요, 누나? 진짜 신기하네요.”
“그냥, 직관? 맞죠, 사장님?”
“직관도 맞지만… 사실 이쪽처럼 어린 친구는 얼굴에 마음이 너무 잘 드러나서,라는 쪽이 정답 아니냐?”
“하여간 좀 있어 보일래도 도움을 안 주셔…근데요, 선생님. 그래서 누가 이겼냐고요.”
은근슬쩍 판정의 부담을 피해 가려던 최현욱이 졌다 싶었는지 양손을 어깨 위로 들어 올렸다. 그럼에도 이로미의 시선은 집요하기 짝이 없었다. 마침내 포기한 최현욱이 한쪽 잔을 가리켰다.
“둘 다 각자의 방식으로 맛있었어요. 근데 아마 일상적으로 마시는 원두를 고르라면… 이쪽.”
“어라.”
“그거 보세요!”
아쉬워하는 소리와 허공에 내지르는 환호가 동시에 겹쳤다. 머리 위로 주먹을 휘두른 이로미가 의기양양하게 외쳤다.
“선생님이 콜롬비아 고르실 줄 알았다니까!”
“사실 이것도 괜찮긴 했는데… 약간 문턱이 있는 느낌이었어요. 그 턱만 없어도 쉽게 넘어갈 것 같은데, 그걸 딱 뭐라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는데…”
“진입장벽?”
“비슷하긴 해요.”
딱 맞는 표현을 찾지 못해 아쉽다는 듯이 최현욱이 미간을 찡그렸다가 벽면의 시계를 보고 깜짝 놀랐다.
“시간 좀 있다고 여유 부리다가 이렇게 됐네요. 또 올게요. 아 참, 이따 가지러 올 테니 로미 씨가 추천한 그 원두 좀 챙겨주실래요? 500g만요.”
“진짜요? 쌤도 도전하시는 거예요?”
이로미가 반색하여 되물었다.
“아주 시시한 도전이지만요.”
“뭐 어때요. 첫걸음이 중요한 거잖아요! 준비해 놓을게요, 이따 오세요?”
“네, 오후예요.”
다시 둘만 남은 카페에서 빈 잔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진태하가 갑자기 심각하게 입을 열었다.
“근데 너 어떻게 알았냐?”
“뭘요. 아, 선생님이 제가 고른 원두를 더 좋아하실 거라는 거?”
인정하기 싫었던 것처럼 불퉁한 목소리였다. 득의만만한 이로미가 보란 듯이 뻐겼다.
“사장님도 참, 마케터 경력이 어디 가는 줄 아세요? 타겟 분석하고, 예상 고객 선호도니 행동 패턴 같은 걸 분석하던 가락이 다른 일 한다고 갑자기 어딜 가겠냐고요. 한번 매의 눈은 영원한 매의 눈이죠.”
“하여간 고분고분 말하는 법이 없어요.”
“고급 정보지만 특별히 말씀드릴게요.”
말은 그렇게 했어도 슬그머니 몸을 기울이는 진태하를 보며 삐질삐질 새어 나오는 웃음을 가까스로 억누른 이로미가 짐짓 진지하게 설명했다.
“선생님이 하시는 작품을 계속 봤잖아요. 근데 이번에 수업하시는 걸 옆에서 들으니까 좀 더 알겠더라고요. 자기가 쌓아온 것을 절대 쉽게 내버리는 분이 아니에요. 음악 취향도 완전 일관성 있으신 거, 사장님은 모르시죠? 뭐,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 그렇긴 한데, 하여간 그 경향이 좀 더 강하달까. 그런 분이 지금껏 고집스레 드시던 품종과 완전히 다른 걸 시도한다? 뭐 시도는 할 수 있죠. 근데 시도까지 만일 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