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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화 Oct 29. 2024

각자에게 예술이란

6. 나선 계단을 오르며(17)

이로미가 선반 위에 곱게 놓인 도자기 티팟을 가리키며 쐐기를 박았다.


“저런 세계관을 갖고 계신 분이라고요, 최 선생님은. 사람 쉽게 안 바뀌어요, 사장님. 나이 들수록 더요. 잘 아시면서. 그치만…”


잠깐 말꼬리를 늘였던 이로미가 창밖으로 보일 듯 말 듯하는 공방을 흘긋거리며 혼잣말처럼 덧붙였다.


“선생님도 조금 변하신 것 같아요. 좋은 쪽으로요.”

“아무래도 그렇겠지, 단시간에 여러 사람하고 함께 보내는 시간이 비약적으로 늘었잖냐. 쭉 혼자 보내는 시간이 그렇게 길었다가 낯선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지내는 게 쉽지 않으셨겠지. 원래 성격이 아주 사교적이신 것도 아닌데.”

“그치만 좋아 보여요. 안 그래요?”


잠깐의 잡담을 끝낼 시간이라고 알리기라도 하듯 문이 달캉 소리를 내며 열렸다. 두 사람이 동시에 어서 오세요, 합창하고 제 자리를 찾아가는 틈에 진태하가 빠르게 말했다.


“그게 형님 장점이잖냐. 나이를 먹어도 오픈마인드인 거. 뭘 지레짐작하고 본인의 틀에 가두고 판단하는 게 아니라 있는 그대로 보고 이해하려고 하는 거, 그거 진짜 쉬운 거 아니다.”


***


조명 스위치를 올리면서 이진우는 새삼스러운 기분에 젖었다. 처음 카페 유리창에 나붙은 클래스 모집 광고를 보고 발을 들였을 때만 해도 이 장소와 이렇게 깊이 연을 맺게 되리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도.


“오늘은 뭐 준비하면 될까요, 선생님?”

“오늘은…”


최현욱은 말을 끌며 공방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늘 비슷한 느낌을 주는 공간으로 유지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쏟아부은 곳이었다. 세심한 관심과 곳곳에 쏟아부은 성실한 습관이 더해져야 유지될 수 있는 것들이 있다고 믿어왔기 때문이었다. 그에게 그런 믿음을 만들어주었던 것은 지금은 그저 취미로 남았을 뿐이라고는 해도 한때 평생을 바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음악이었다. 매일같이 반복하는 연습이, 지금 당장은 어떤 대단한 성과를 보여주지 않아도 언젠가 크게 도약할 수 있는 기량이 되어줄 거라고 믿고 실천했던 세월이 있었다. 그 시간은 다른 일을 시작했을 때에도 용기를 주었다. 다를 것 없다고, 어떤 일이건 근간은 다 똑같은 거라고.

 

“구상을 하고 작품 해야지, 뭐. 항상 하던 것처럼.”


작품이라는 말에 이진우가 오, 하는 탄성을 올렸다.


“선생님이 작품 구상부터 하시는 건 처음 보는 거네요. 멋있다.”

“아직 아무것도 안 했는데 멋있긴 뭐가 멋있어, 녀석아.”

“그냥요. 왜 티비에서도 보면요, 대가라고 하는 분들은 뭘 하겠다고 말하면 말하는 순간부터 분위기가 달라지더라고요.”

“그래서 옆에서 보니까 뭐가 달라?”

“눈에 보이는 건 아니지만요.”


이진우가 고심하며 최현욱의 주변으로 빙글빙글 시선을 굴렸다. 그 얼굴이 재미있어서 최현욱은 하하, 소리 내어 웃으며 그의 어깨를 툭툭 쳤다.


“보이는 건 없지만 보여지고 싶어 하는 아이디어들은 많겠지. 맞니?”

“네! 맞아요! 그런 거 같아요.”

“오늘은 진우가 도와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뭔데요?”


제가 도와줄 수도 있다는 말에 이진우의 눈이 반짝거렸다. 그걸 무엇이라고 부르면 좋을까. 최현욱은 고민했다. 아직 이름 붙이지 못한 설렘의 이름. 여기저기서 툭툭 치여 원래의 제 모습조차 잃었을 하찮아진 마음들. 사람들은 너무 바빠서 차마 들여다봐줄 시간이 없어 점점 작아지고 있는 소망과 기대들. 그런 것들을 찾아내어 형태를 입히고 그들이 살아갈 안정적인 세계를 만들어주는 일을 이제는 누군가와 함께 머리 맞대고 고민하며 빚을 수 있다는 사실이 퍽 감격스러웠다.


“그런 걸 생각해 보자. 누군가가 알아줬으면 했지만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순간이나, 너무 소중하고 감동적이어서 오래오래 간직하고 싶었던 그런 때가 있었는지.”

“생각해 보면 있긴 할 건데, 그걸로 뭘 하는데요, 선생님?”

“그런 마음을 절로 떠올릴 수 있는 풍경과 동물 친구들을 떠올려보는 거지. 그러니까… 예를 들면, 11월 말의 상수리나무 아래에 웅크리고 있는 다람쥐가 도토리 한 알을 소중하게 껴안고 있는 걸 본다면 무슨 생각을 할 것 같니?”

“... 일단 귀엽고…”


재깍 튀어나온 대답이 최현욱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귀여운 거 참 좋지. 사람들은 대체로 귀여운 것엔 친근감을 느끼니까.”

“다행이다, 축하해. 그리고…또…잘됐… 다?”

“그렇지. 운 좋은 녀석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그런데 그 다람쥐가 한껏 뿌듯한 표정을 짓고 있으면 어떨까.”

“정말 잘됐다.”


마치 눈앞에 최후의 도토리를 끌어안고 감격스러워하는 살아 있는 다람쥐가 있기라도 한 것처럼 이진우가 몹시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거야, 진우야. 나는 그거면 만족해. 물론 굉장히 진지하고 의미 있는 작품을 하시는 분들도 많지만, 나는 그렇게까지 대단한 예술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못 되거든.”

“아니에요, 선생님 작품 보고 있으면 굉장히 기분이 좋아져요. 마음도 따뜻해지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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