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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화 Nov 01. 2024

최종화. 삶에는 모범답안이 없다

6. 나선 계단을 오르며(18)

“과분한 칭찬이네.”

“감동적이라는 말이 이런 데도 써도 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저는 그랬어요. 감동적이었어요.”


아련한 과거를 회상하는 것처럼 허공을 바라보던 이진우가 조그맣게 웅얼거렸다. 최현욱은 감동이라는 표현을 아낌없이 베풀어준 것에 대해 오히려 고마워하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마음이란 것은 시간을 먹을수록 딱딱한 껍질을 덮어쓴 생물처럼 굳어지게 마련이었다. 예기치 않았던 손님이 찾아와 굳이 문을 두드리지 않으면 그대로 잠들어 어쩌면 영원히 깨어나지도 않을 연약하고 숨이 짧은 생명체. 그것이 마음이니까.


“그거 고맙구나.”


조금 목이 메는 기분으로 최현욱이 진심을 말했다. 그가 무슨 생각으로 고마움을 말했는지 이해하지 못한 이진우는 어깨를 으쓱이며 아니에요, 하고 가볍게 되받았다.


“짧았지만 수업을 하길 참 잘했다 싶다.”

“저도요. 사실… 별로 안 좋은 소리도 듣고 그래서 고민 많이 했었는데, 잘했다고 생각해요.”

“안 좋은 소리?”


뒤늦게 말실수를 했다고 생각한 이진우가 낭패한 얼굴로 슬그머니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런 행동이 오히려 강한 긍정이 된다는 것을 전혀 자각하지 못하는 태도였다. 최현욱이 여유롭게 웃으며 그를 격려했다.


“괜찮아, 말해봐. 별소리를 다 들어 봐서 나도 어지간한 말에는 상처도 안 받거든.”

“......”

“괜찮다니까?”

“... 돈도 안 되는 유치한 취미생활에 돈 쓸 생각을 하다니 생각보다 여유가 있나 보다고…”


이진우는 차마 말을 맺지 못했다. 최현욱은 더 말하라고 채근하지 못했다. 그에게는 여기까지 오는 선택을 하는 것 자체가 비아냥과 염려와 그 밖의, 요청한 적 없는 조언을 물리쳐야만 가능한 일이었음을 이제야 알게 된 때문이었다. 최현욱이 씁쓸하게 말했다.


“나도 그 소리 참 많이 들었지, 처음 도자기 배울 때 말이야.”

“선생님도요?”


같은 경험을 했다는 말에 이진우의 안색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최현욱은 오래전에 결이 같은 이야기를 스승에게 듣고 크게 위로받았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랬었지. 너무 마음에 담아둘 것 없어. 사람들 말이란 게 원래 그렇지, 뭐.”

“네!”

“그래서, 뭘 하고 싶니?”

“네?”


어리둥절한 반문과 시선이 최현욱을 향했다. 어느새 작품을 진열해 둔 장식장 앞으로 가 있던 그가 손짓해 이진우를 불렀다. 하나하나 조심스레 먼지를 털어내는 조심스런 몸짓에서 그가 자신의 조그만 창작물들을 얼마나 애틋하고 귀중하게 여기는지가 훤히 보였다. 이진우는 그런 것이 좋았다. 최현욱에게 붙일 수 있는 사회적인 이름표 중에서 그에게 어울리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았다. 어떤 기준으로도 재단할 수 없는 사람이 이렇게 가까이 엄연히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이 이진우에게는 어떤 희망과도 같았다. 사회가 요구하는 기준에 맞추지 않아도 괜찮은 사람으로 살 수 있다는 증거였다. 자신도 그렇게 살 수 있다고 격려받는 기분이었다. 그러니까, 분명히 어떤 모범답안을 정해두고 묻는 질문이 아닐 것이었다. 이진우는 천천히 생각을 골랐다.


“선생님이 얘기해 주셨던 다람쥐 있잖아요, 상수리나무 아래에서 도토리를 찾는…”

“어, 그래. 그랬었지?”

“그 다람쥐 얘기를 계속 생각했는데…그 다람쥐가 저 같아요. 그래서, 뭔가를 만들 수 있다면 그게 제일 만들어보고 싶었어요.”


최현욱이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별것 아닌 그 자세 하나가 제 마음에 차오른 말을 끄집어내는 마중물이 되었다.


“그럼, 뭐부터 하려고?”

“ 그 다람쥐가 어디에서 사는지, 뭘 좋아하는지… 가족은 누가 있고, 지금의 고민거리는 뭔지, 그런 걸, 종이에 옮겨보려고요. 생각나는 대로 끄적이고 그려보고… 그런 것부터 생각하는 게 이상할까요?”


지금의 이진우는 모를 터였다. 그런 고민을 안고 걱정하며 몇 발을 내디뎠다가 되돌아와 또 다른 시도를 해볼 수도 있다는 것 자체가 지금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도. 고민하고 시도하고 실패해 보는 것은 배우는 이의 특권이었다. 염려와 기대를 섞어 누군가의 성장을 바라보며 응원하는 것이 가르치는 자의 특권이고 기쁨인 것처럼.


“괜찮아. 모범답안 같은 게 어디 있겠니. 그러면서 찾아나가는 거지… 그러니 지금 마음속에 생각난 걸 신나게 쏟아내 봐. 그게 먼저야.”


고개를 주억거리며 조그만 인형들을 둘러보는 이진우의 옆얼굴은 더할 나위 없이 진지했다. 그 옆모습을 바라보던 최현욱은 불현듯 조금 전 그가 입에 담았던 유치한 취미생활, 이라는 말을 상기했다. 그런 말이 상처가 되었던 때가 있었다.


충고를 가장한 빈정거림을 감당해야 했던 세월은 짧지도 않았고 말들과 시선이 남긴 상흔은 길었다. 타인이 생각 없이 던지는 말들로 인해 남는 상처보다, 자신이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외면해서 생기는 상처가 훨씬 깊고 오래갔다. 우습게도 내면의 상처를 치료한 것은 결국 타인의 지적에 덮어버리려 했던 솔직한 자기 자신이었다. 그걸 인정하고 나서야 모든 것이 하나씩 바뀌었다.


고개를 숙이고 열심히 뭔가를 끄적이는 소년의 어깨 위로 무언가가 반짝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최현욱은 뒤늦게 하나를 더 깨달았다. 자신 역시 새로운 시도에 발을 디뎠다는 것을. 해보지 않은 일이라서 결과를 장담할 수 없다고 고사했으면 결코 열리지 않았을 페이지가 열려 있었다. 안타까웠던 진우의 사연을 몰랐으면 오지 않았을 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기대된다는 쪽이 맞을 것이다.


계획하지 않았던 일들이 때로는 삶에 좋은 변화를 가져온다는 것을 새삼스레 되새기는 찰나 불어온 바람이 마침 창가에 매달아 두었던 풍경이 흔들리며 맑은 소리로 울었다.

                    

(完)






후기


필화

 <1200도의 소소한 다정>의 숨은 채찍 필화입니다. 웃음소리가 맑은 담화님과 올 5월부터 쓰기 시작한 이야기가 이제 끝을 만나게 되었네요. 그동안 읽어주셔서 깊이 감사드립니다.

이 이야기는 위로와 용기가 필요한 분들에게 다가가 다정하게 안아드리고 싶은 마음으로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간 읽어주신 여러분들께 위로가 되었을는지요...

올해가 이제 딱 두 달 남았습니다. 남은 기간 계획했던 일들 다 이루시고, 주변의 소중한 이들과 온기를 주고받는 따뜻한 겨울 지내시길 바랍니다.

소중한 독자님들과 언젠가 또 만나게 되길 바라며… 2024년 11월 필화 드림.


담화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연재가 드디어 끝났습니다. 기획했던 기간까지 더하면 일 년이 조금 넘는 기간이었군요. 원고 퀄리티보다도 더 중요하게 생각했던 건 '연재일정사수'였습니다. 한 번의 펑크가 있었지만(+ 수없이 많은 펑크의 위기가 있었지만) 어쨌든 완결을 냈다는 사실이 제일 기쁩니다. 사실 에피소드 트릿에는 조금 더 많은 이야기 씨앗들이 들어있었(던 것 같)지만 그걸 모두 풀어놓기에는 시간적 여가도 심리적 여유도 부족했던 느낌입니다. 어딘가 아쉬움이 많이 느껴지는 글이었다면 그것은 모두 저의 역량부족 탓입니다. 정진하겠습니다. 한동안은 다시 조각글을 열심히 쓰려고 합니다.


덧. 교정을 맡았던 필화 님이 말씀하시길, 제 문장은 늘 대체로 한참 열심히 읽어 내려가다 동사가 출현한 순간에야 지금까지 읽었던 것이 몽땅 주어구였다는 놀라움을 종종 안긴다고 하더군요. 같은 것을 느낀 분들이 계시겠지요. 죄송했지만... 하지만 그것은 고칠 수 없는 불치병입니다... 문체는 타고난 낙인이죠, 예...





추가_

10회차 미만으로 발행된 연재형 브런치북은 발간이 안 된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았습니다. 연재가 종료됐음에도 계속 미완으로 보이게 될 것이 영 탐탁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을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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