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성근, 이상한 나라의 책 읽기
목차 옆 페이지에 단호하게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책을 읽는 열 가지 방법」. 그렇다. 나는 방법론을 좋아한다. 물론 그게 나와 맞거나 맞지 않거나는 그다음 문제다. 대체로 특정한 방법론을 주창하는 사람들은 두 부류로 나뉘곤 한다. 1. 나는 이렇게 생각하지만, 물론 내 생각은 언제든 틀릴 수 있다라고 겸손하게 한걸음 뒤로 물러나는 타입 2. 닥치고 내 말만 따라 하면 된다. 세상에 이것 말고 다른 정론은 있을 수 없다고 진리(당신만의)를 설파하는 타입.
나는 퍽 순진(맹)한 편에 속해서, 세상 사람들은 대체로 1에 속한다고 생각했다. 한데 최근 10여 년 간 거의 맹목적이다시피했던 나의 멍청이 세계관을 산산이 깨부수어준 완전체 인격 -_- 을 몇 만난 덕에 인간에 대한 이해의 폭이 강제 업그레이드되었다. 새삼 심심한 감사를 표하는 바이다(사실 안 감사하다. 인생 그렇게 살지 마). 어쨌건 이 소제목만 보면 어쩐지 거부감을 일으키실 분도 계시겠지만, 이 책을 쓴 저자는 그런 편협한 사고방식의 소유자는 아니니 심려 놓으시고 책을 읽어도 좋겠다(개인적인 친분 1도 없다. 하지만 어떤 사람의 글을 지속적으로 쭉 읽다 보면 대체로 잡히는 인상의 윤곽이란 게 있지 않은가... 당연히 그 예측의 범위를 뛰어넘는 놀라운 신형모델;;이 늘 출현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게 인생살이의 슬픔과 엿같음(죄송합니다))이라고 하겠다). 쓸데없는 말이 길었다.
저자이신 헌책방 주인의 말에 따르면, 책을 읽는 열 가지 방법은 다음과 같다.
1. 사람을 읽는다
2. 재미로 읽는다
3. 빠르게 읽는다
4. 느리게 읽는다
5. 걸으며 읽는다
6. 번역을 읽는다
7. 무작정 읽는다
8. 쓰면서 읽는다
9. 겹쳐서 읽는다
10. 여러 번 읽는다
각 챕터에 해당하는 사례가 될 만한 책들이 소개되어 있고, 해당 독법에 속할 만한 책들을 읽으며 함께 고민하면 좋을 생각거리들을 몇 꼭지씩 같이 제안하고 있다. 예를 들면 '사람을 읽는다' 챕터에서는 평전을 다루고 있는데, 평전의 가치는 어디에 있으며 평전을 읽으며 독자가 얻을 수 있는 것들이 무엇이 있을지에 대해 저자의 의견을 친절하게 풀어놓는다.
사람에 관한 책을 읽으면 그들이 어떤 의심을 통해 자기 삶을 앞으로 밀고 나갔는지 엿볼 수 있다. 좋은 일이든 그 반대이든 역사에 기억될 만한 일을 했던 사람들은 늘 그 시작이 의심이었다.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을 의심했던 사람들이다. 그 의심이 생각을 발전시키고 생각은 철학이 됐다. 그래서 철학자 이진경은 "'철학하기'는 자명한 것을 의심하고 질문하는 특수한 실천"이라고 정의한다. -40쪽
독서란 자신의 내면에 끊임없이 질문을 만들어내게 하는 과정이자 결과라고, 어디서 읽은 기억이 있다. 하지만 독서 초보자에게 그것은 너무나 아득한 조언이지 않을까. 읽고 이해하기에도 바쁜데 무슨 생각까지 하라는 거야,라고 할 수도 있다. 그것은 마치 이제 갓 핸들을 잡은 초보 운전자에게 고개를 들어 앞을 보고, 도로의 흐름을 읽으라거나(어쩌라고) 오선을 벗어나는 덧줄을 세어가며 음이름을 읽기도 바쁜 초보 연주가에게 화음의 진행을 파악(나 안 해)하라는 것과 같다고 하겠다. 그거슨 ちょっと無理です... 아니 조금이 아니라, 실로 무리한 요구가 아닌가! 그럴 때 필요한 것은 단계 단계를 짚어주는 상냥한 선생님이지 아니 그걸 왜 못해요, 하고 갸우뚱하는 공감불능자가 아닌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이 책은 요즘 텍스트힙이 어쩌고 하던데, 책 좀 읽어보려고 해도 당최 뭘 읽어야 할지 모르겠어요, 하고 방향을 상실한 초보자에게 권하기에 아주 적절한 가이드가 될 수 있겠다.
책을 다 읽은 다음에는 본인이 각 항목에 대해 어떤 책들을 떠올렸는지를 정리해 봐도 재미있을 것이다. 나는 대강 이런 책들을 생각했다.
1. 사람을 읽는다 - 인터뷰집, 소설
2. 재미로 읽는다 - 가벼운 에세이, 웹소설
3. 빠르게 읽는다 - 2+여러 번 거듭 읽었던 책들
4. 느리게 읽는다 - 시, 대체로 머리를 많이 써야 하는 논픽션
5. 걸으며 읽는다 - TTS, 오디오로 들을 수 있는 책이면 무엇이든
6. 번역을 읽는다 - 농담 반 진담 반 섞어 초월번역...이라고 불리는 책들이 있다. 그런 책을 원문과 대조해서 읽으면 무진장 재미있다...
7. 무작정 읽는다 -뭔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는, 사전지식이 전무한 책들. 무지성으로 세 번쯤 읽으면 그제야 뭘 알 듯 말 듯.
8. 쓰면서 읽는다 - 첫 페이지를 펼치자마자 이건 내 거다, 죽을 때까지 가져간다,라는 느낌이 팍 오는 책들이 있다. 그러면 면지에 날짜와 왜 구입했는지부터 적어놓고 페이지마다 떠오르는 온갖 단상을 다 끼적이면서 읽는다. 어쩐지 공부 열심히 한 느낌이어서 뿌듯함 +10 pt. 적립 효과 발생.
9. 겹쳐서 읽는다 - 뭔가 공부해야 할 때... 웃긴 거 하나, 나이 먹으면 공부가 되게 재밌어진다. 억울하다.
10. 여러 번 읽는다 - 재밌었던 거라면 뭐든!
책에서 재미를 찾는다는 말은 내가 거쳐 온 작은 생활의 조각들을 기워내는 방법을 배운다는 의미다. 책 그 자체가 재미있다기보다 책을 통해 삶 속 재미를 찾을 수 있는 여지를 더욱 많이 알아가는 과정을 말한다. -93쪽
느리게, 더 느리게. 될수록 많은 상징과 의미를 찾아내는 일이야말로 책을 책다운 물건으로 만드는 행위다. 출판된 한 권의 책은 언제나 같은 책이다. 그러나 읽은 사람이 제각각의 의미를 만들어 낼 때, 책은 한 권이 아니라 읽은 사람만큼 증식하여 퍼져나간다. 그것이야말로 진정으로 작가들이 의도하는 비밀스러운 속셈이다. -148쪽
모든 걸 떠나서 책 읽을 때 언어 공부가 중요한 이유는 나만의 번역서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새물결 출판사에서 펴낸 「일방통행로」는 벤야민의 글을 옮긴 이 조형준 씨가 이해한 대로 번역한 결과물이다. 이 사람이 아무리 뛰어난 학자라고 해도 내가 이해한 벤야민과 같을 수는 없다. 우리는 책을 읽으며 각자의 이해를 바탕으로 한 자기만의 일방통행로를 가져야 한다. 다른 사람이 이해한 걸 마음에 든다며 마냥 뒤따르는 게 아니라 나만의 고유한 이해를 찾는 과정. 그것이야말로 번역서에 접근하는 가장 훌륭한 길이다. -234쪽
책을 덮고 문득 궁금해졌다. 내게는 책 읽는 방법이 과연 몇 가지나 있을까 하는. 그런데 그 답을 찾을 날은 영영 오지 않을 것 같다. 굳이 세어 볼 의욕이 생기지 않기 때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