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산호, 긍정의 말들
특정한 언어권에서 나오는 책들을 많이 읽다 보면 번역가들의 이름이 낯익어진다. 노지양, 김명남, 노승영, 권남희 번역가 등등이 내게 그런 식으로 낯익은 이름이 되었는데 박산호 번역가의 이름은 왜인지 좀 생경했다. 이분이 번역하신 걸 한 번도 못 읽어봤나 싶어 검색까지 해봤는데 웬걸, 아니었다. 하지만 어떤 책을 읽고 나서 나는 박산호 님의 이름을 완전히 머리에 새겨 넣게 되었는데 그 책의 제목은 다음과 같다. 「번역가 모모 씨의 일일」. 이 책 이전에는 두 번역가가 나란히 편지를 교환하여 한 권의 책이 되었던 「우리는 아름답게 어긋나지」를 아주 재미있게 읽었었는데... 일단 넣어두고...
에세이 중에서는 글쓴이의 사고방식을 포함하여, 그가 속한 세계와 그 세계가 드리우는 빛과 존재의 그림자마저 선명하게 드러내는 글이 있는 반면에 철저하게 자신을 감추고 그럴듯한 말만을 늘어놓으며 막연한 공감만을 구하는 글도 있다. 후자에 속하는 글은 무수히 많고(갑분고백, 본인 포함) 누구나 쉽게 쓸 수 있다. 하지만 전자에 해당하는 글은 자신을 솔직하게 노출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어떤 삶을 살았건 그의 삶이 글의 재료가 되어주는 까닭에 치열한 일상의 결을 낱낱이 드러내지 않고서는 도무지 글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잘 쓴 에세이는 독자가 모르는 삶의 크고 작은 기쁨과 슬픔들을 대리 체험하게 하고 몰랐을 타인의 인생을 응원하는 마음까지 갖게도 한다.
지금껏 한 번도 안 해 본 일이고,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힘에 부칠 게 뻔했다. 무엇보다 이 나이에 새롭게 도전하는 게 무서웠다. 그때 상대가 이렇게 말했다. "어머, 블링블링한 50대시잖아요. 지금도 충분히 할 수 있어요." -21쪽
어쩌면 나는 작가로서 실패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당장 머리를 풀어헤치고 한강으로 달려갈 정도의 실패는 아닌 것 같다. 사실 인생이란 크고 작은 실패를 반복하며 사는 것임을 잠시 잊고 있었다. 그러니, 실패해도 괜찮다. 다만 체념은 하지 않겠다. -23쪽
흐느끼는 여자에게 이렇게 말해 주고 싶었다. 지금은 심장이 찢어질 것처럼 아파도 언젠가는 그렇게 울게 만든 연인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힘이 될 거라고. 결국 우리에게 남는 건 사랑하고 사랑받았던 그 마음 하나다. -35쪽
내가 이 책을 읽지 않았다면 나는 여전히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른' 번역가의 삶을 멋대로 상상해서 그리고 있었을 것이다. 나와 매한가지로 매몰찬 거절의 말에 상처도 받고 경우 없는 비난(비판 아님에 유의)의 말에 소위 마상을 잔뜩 입고 한껏 우울해지기도 한다는 사실을 몰랐을 것이다. 소설과 달리 실존하는 타인의 진솔한 삶을 들여다본다는 건, 세상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가는 것과 같은 일일 것이다. 세계는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니까.
무엇보다도 나는 이 책의 집필의도가 선명하게 읽히는 사실이 참 좋았다. 에세이 장르의 특성상, 저자의 의도가 명확하게 드러나는 책은 드문 편이지만 이 책은 그렇지 않다. 심지어 어떤 마음으로 이 책을 썼는지를 아주 정확하게 밝혀 쓰시기도 했고.
비비언 고닉이 이렇게 말했다.
작가의 민낯이라는 원료로 만들어지는 서술자는 이야기에 꼭 필요한 존재이다. 이 서술자가 페르소나가 된다. 그의 어조, 그의 시각, 그가 구사하는 문장의 리듬, 관찰하거나 무시할 대상은 주제에 맞게 선택된다. 그렇지만 우리에게 가장 크게 보여야 하는 것은 서술자 혹은 페르소나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다.
- 「상황과 이야기」, 11쪽
이 관점에서 평가할 때 이 에세이는 정말로 잘 쓴 에세이가 틀림없다. 서술자가 시종일관 유지하는 사고방식 또한 정직하며 그와 비슷한 삶을 지향하는 이들에게는 진실로 응원이 된다(내게 그랬다). 고마운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