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스 캐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누군가의 이름이라기보다 한 시절의 표상과도 같이 읽히는 이름을 가진 앨리스에게.
안녕, 앨리스. 미루기의 달인이 되어버린 나를 기어코 끌어다 앉힌 호기심 만만한 어린 아가씨.
늘 그랬듯 수신인의 이름을 적고 나면 나는 꽤 오래 고민해요. 내가 이 인물을 처음 만났을 때의 나이로 되돌아가서 인사를 건네는 게 맞을까. 아니면 지금의 내 나이, 이 눈높이에 적절한 인사를 하는 게 맞을까를요. 그 두 지점의 좌표차가 크면 클수록 고민은 깊어지죠.
앨리스는 내게 오래된 친구지만, 최근 자주 만났던 친구라고는 할 수 없으니까요. 그리고 경험상, 한참 동안 만나지 않았던 친구에게 오랜만에 손을 내밀었다가 다시 만나서 반갑고 좋았던 기억보다는 아- 그냥 계속 만나지 않는 게 더 나았을 텐데 싶은 경우가 훨씬 많았거든요. 하지만 아마도 이런 재회는 예외가 되지 않을까 싶어요. 왜냐면 두 사람이 다 변한 게 아니니까. 한 사람은 여전히 그때 그 모습 그대로를 간직한 채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을 테니까. 나만 그 시절로 잠시 돌아가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면 되는 일이잖아요. 물론 그 시간의 골이 퍽 깊어서 쉬운 일이라곤 할 수 없지만.
어떤 이야기건 간에 참으로 신기하게도 오래 기억되는 건 인물들이 생생하게 살아 있는 이야기인 것 같아요.
그 인물이 항상 합리적이고 모범적이며 타의 귀감이 되어야 할 필요가 없는 것도 이야기의 특혜 중 하나죠. 괴상하기 짝이 없고 어딜 봐도 현실에서 만나고 싶지 않은 인물이어도 얼마든지 인기 있는 캐릭터가 될 순 있잖아요.
앨리스의 이상한 나라에 살고 있는 이들이 딱 그렇죠. 허공에 웃고 있는 입만 남기는 체셔 고양이가 제일 먼저 생각나요. 물론 볼 때마다 시간에 쫓기고 있는 토끼도 빠트릴 수 없죠. 미친 모자 장수는 또 어떻고요. 이미 멸종되어 버린 도도새도 물론이고, 흰 장미를 빨간 장미로 만들기 위해 빨간 페인트 칠을 하다가 목이 날아갈 위험에 처한 트럼프 카드 병사도 있네요.
그런데 어릴 때의 나는 이 이야기가 참 이해하기 힘들었어요. 지금 봐도 어떤 맥락으로 이어지는 이야기인지 따라가기 힘겨운 면이 없잖아 있다고 생각해요. 어쩌면 이건 이성의 세계를 떠났던 앨리스가 환상과 공상이 날뛰는 무의식의 세계에서 펼쳐진 모험 활극일지도 모르죠.
어쩌면 앨리스가 마침내 하트의 여왕을 만나는 순간에 이르기까지 만나야 했던 모든 인물들은 제가끔의 이야기 씨앗을 품고 있는, 주인공이 될 준비를 하며 기다리고 있는 존재들이었을 수도 있죠. 만약 루이스 캐럴에게 좀 더 긴 창작의 시간이 주어졌다면, 정말로 엄청난 규모의 옴니버스 소설이 탄생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도 하게 되거든요.
뭐, 그건 그렇고.
앨리스는 한참 뒤에 이 일을 곱씹어 보고서야 이상한 일을 평범하게 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모든 게 지극히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12쪽
이런 첨언을 발견하면, 이미 이상한 나라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 모든 것이 너무 당연하게 느껴진 나머지 무엇이 이상한지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마저 든단 말이죠. 여전히 그곳에 한 발을 걸치고, 이곳에 남은 한 발을 걸친 채로 그렇게 위태위태하게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공상마저도. 그런데 어쩌면 그런 사람들은 지극히 안전하게 두 발을 땅에 딛고 있는 제대로 된 ‘어른’은 못 될지 몰라도, 자기 나름으로 꽤 만족스럽게 재미있는 삶을 살고 있지 않을까요. 솔직히 말하면, 나도 그렇거든요. 남들이야 뭐라건 말이에요. 음, 이건 사실 타인의 평가나 시선에 크게 개의치 않는 기질을 타고난 덕을 톡톡히 보고 있긴 하지만요…
앨리스는 학교에서 수업 시간에 이런 걸 몇 가지 배웠다.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없기 때문에 그런 걸 아는 척하기에는 그다지 좋은 기회가 아니었지만, 거듭해서 외워 두면 공부에 도움이 될 것 같았다. -13쪽
앨리스는 위도가 무엇인지, 경도가 무엇인지는 하나도 몰랐지만, 멋지고 대단한 단어 같아서 그렇게 말해 보았다. -14쪽
이 글을 쓰기 위해 다시 펼쳤던 책에서 이런 친절한 참견을 발견했을 때는 솔직히 좀 놀랐어요. 루이스 캐럴이 독자들이 앨리스가 어떤 아이인지 알아주기를 바랐구나, 싶기도 했고요.
어쩌면 진짜 앨리스 프레장스 리델이 이런 기질을 가진 아이였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죠. 아무튼 그에게 앨리스가 특별한 소녀였다는 것만큼은 아주 잘 알게 됐죠. 적어도 이야기 속의 앨리스는 아이답게 궁금한 건 해봐야 하고 필요할 때는 용기 내기를 주저하지 않았으니까요. 무엇보다도 다른 세계의 가능성을 믿었으니 꿈을 빌려서 이상한 나라는 앨리스에게 문을 열어주었을 거예요.
언니는 눈을 감고 앉아서 자신이 이상한 나라에 있다는 것을 반쯤은 믿었다. 하지만 눈만 뜨면 이 모든 것이 단조로운 현실로 바뀌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183쪽
대부분의 어른들은, 우리는 이미 이렇게 어떤 가능성을 닫아놓은 상태로 살고 있기 때문이죠. 아무려면 어떤가요. 한때나마 사랑했던 수많은 이상한 나라들은 이렇게 온전하게 연약하지만 단단한 종이의 세계 안에서 그대로 살아 있는데요, 뭐. 모두에게 안부 전해 주세요. 제멋대로인 여왕님과 좀 공작 부인은 빼고. 하여간 귀족들이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