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고 기댈 수 있었던 유일한 어른

델리아 오언스, 가재가 노래하는 곳

by 담화

누구에게나 존경받아 마땅한 점핑 씨.


영면 중이실 분을 불러내는 민폐를 끼쳐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지금은 2025년, 당신이 어린 캐서린 대니얼 클라크- 당신이 즐겨 이리 부르던 미스 카야에게 관심과 보살핌이라는, 애정의 다른 이름을 살뜰하게 나눠주었던 1950년대로부터 무려 75년이 지난 시대지요. 노스캐롤라이나 주 역시, 그때 그 시절에 비하면 천지가 개벽한 수준으로 달라지지 않았을까 짐작합니다. 글쎄 아무튼,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나온 시대라니까요, 지금은. 상상이나 해봤을까요, 여전히 짐 크로 법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던 시절을 살았던 사람들은. 그런데 우스운 건 여전히 흑백차별은 곳곳에서 만연하다는 사실입니다. 음, 어쨌든 이런 얘기를 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가재가 노래하는 곳」에는 인간적인 매력이 폴폴 풍기는 사람들이 여럿 나오죠. 외로웠던 카야를 사랑해 준, 카야의 삶에서 제일 중요한 두 사람이라면 역시 테이트와 점핑 씨일 거예요. 하지만 테이트는 카야의 제일 중요한 사람이기도 하고 가장 프라이빗한(어째서인지 여기엔 '사적이다'는 말보다는 '프라이빗'이 한 겹 더 비밀스러운 휘장을 두르고 있는 느낌이어서, 저한테는 외래어지만 굳이 써봤어요) 사람이니까 제외하고(그리고 테이트한테 무슨 말을 해준다고 해봤자, 에라이 이 멍청아 소리를 내뱉은 뒤 주먹을 들어 올리게 될 것 같아서 관뒀다고 합니다) 그러면 역시 점핑 씨와 메이블 말고는 이야기하고 싶은 사람이 떠오르지 않더란 말이죠.


저는 굉장히 좋아하는 흑인 배우가 한 사람 있는데, 점핑 씨에 대한 묘사를 읽을 때마다 눈앞에서 그분의 얼굴을 한 점핑 씨를 상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수더분한 외모에 공손하지만 비굴해지지 않는 품위가 엿보이는 얼굴을 한 분이거든요.


하얀 구레나룻과 소금과 후추를 뿌린 듯한 머리카락이 넓적하고 너그러운 얼굴과 부엉이 같은 눈을 감싸고 있었다. -85쪽


점핑 씨의 얼굴을 그려보다 혼자 고개를 끄덕거리며 맞아, 딱 그분 얼굴인데. 하게 된다니까요.

사람이 어느 정도 나이를 먹으면 제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이 있는데 정말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곤 해요. 점핑 씨도 틀림없이 그렇게 나이를 먹었겠죠. 결코 마주칠 가능성이 없는 두 사람이 하나의 인물로 겹쳐 보이는 건 제법 신기한 우연이지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시나요?


"맙소사, 우리가 뭐라도 좀 해줘야겠어요. 누가 이런 생선을 사가겠어요. 나야 스튜에 넣어서 요리라도 하겠지만. 우리 교회에서 아이 옷가지하고 또 다른 물건들을 좀 구할 수 있을 거예요. 잉어 몇 마리 잡아오면 스웨터로 바꿔줄 집도 몇 집 있고요. 그 애 옷 사이즈가 어떻게 돼요?" -106쪽


홍합을 캐 오고, 도저히 먹지 못할 생선절임을 만들어 온 카야로부터 너그럽게도 그것들을 기꺼이 사들여준 당신은 제 먹을 것을 스스로 벌겠다는, 자립심 강한 어린 여자아이의 마음을 결코 훼손하지 않았죠. 아내인 메이블과 머리를 맞대고 어찌하면 좋을지 고민했을지언정 카야 앞에서는 아이의 노력을 얕잡아보는 어떤 말도 하지 않았어요. 보호자도 없이 홀로 남은 소녀에게 정당한 거래의 대가로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제공하며 세심하게 살폈죠. 게다가 초경을 맞아 당황한 카야가 메이블을 찾아왔을 때, 50년간 어린 딸이 죽은 날을 제외하고는 단 하루도 가게를 비운 적이 없던 당신이 카야를 돕기 위해 메이블을 부르러 가느라 가게를 비우기까지 했죠. 카야는 당신과 메이블에게 딸이나 다름없었던 거예요.


첫사랑이었던 테이트가 떠난 뒤 카야가 마을에서 가장 인기가 높은 체이스를 만나기 위해 당신의 가게 근처를 배회하고 있었을 때가 가장 힘들었던 때가 아니었을까 생각해요.


체이스 앤드류스가 어떤 인간 말종인지 뻔히 알면서도, 자식이나 다름없는 카야의 선택을 존중해야 한다는 마음과 단 한마디라도 그러지 말라고 말을 얹고 싶은 충동 사이에서 얼마나 괴로웠을지 같은 마음이 되어버립니다. 그럼에도 카야가 괴로운 실연을 극복하고 스스로 진정한 자립을 이루어냈을 때 당신은 얼마나 뿌듯했을까요, 얼마나 자랑스러웠을까요.


점핑은 처음에는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했다. 그래서 카야는 자기 이름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이제 나 괜찮아요, 점핑 아저씨. 고마워요. 그리고 지금까지 해주신 모든 것들 고맙다고 메이블 아주머니에게도 감사 인사 전해주세요."
(...)
점핑의 부두를 찾을 때마다 카야는 훤히 잘 보이는 창가에 자랑스럽게 자기 책이 놓여 있는 모습을 보았다. 아버지가 딸의 책을 자랑하듯이. -275쪽


당신이 카야를 딸로 여긴 것이 더 오래되었을까요, 카야가 당신을 아버지로 여긴 것이 더 오래되었을까요. 부질없는 질문이고 무슨 의미가 있나 싶은 말이지만 가끔 어떤 관계에서는, 그래서 누가 먼저였는데?라고 짓궂게 캐묻고 싶어질 때가 있어요. 그런데 어쩐지 카야와 점핑 씨의 모의 부녀관계에서는요, 거의 그 일이 동시에 일어나지 않았을까 싶어지는 거예요. 당신이 예의 활기찬 미소를 지으며 만나서 영광이에요, 미스 카야,라고 말했을 때 카야는 제게 그토록 다정하고 예의 바르게 인사해 주는 어른을 처음 보았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황무지에 홀로 핀 야생화가 훌륭한 한 사람의 어른으로 자랄 수 있도록 지켜봐 준 태양은 당신이었을 거예요, 점핑 씨. 외로운 아이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준 것, 세상에서 가장 훌륭하고 가장 어려운 일이잖아요. 진심으로 존경을 보냅니다. 잠시지만, 깊은 잠에서 깨워서 죄송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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