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서야 뒤늦게 고맙다고 말해요

메리 앤 셰퍼 & 애니 배로우즈, 건지 아일랜드 감자껍질파이 클럽

by 담화

호기심도 많고 독립적이며 무엇보다도 글과 책을 사랑하는 줄리엣, 안녕.


아마도 지금 건지 섬은 망명 생활을 했던 빅토르 위고의 이름보다 명랑하고 재치 있는 줄리엣 애쉬튼의 이름과 엮어서 알고 있는 사람이 더 많을 것 같아요. 그야말로 문학적인 아우라가 드리워진 장소가 되었달까요. 참고로 나는 양방향 다 좋아해요.

줄리엣을 알게 된 지도 꽤 지났어요. 햇수로 헤아려 보니 1x 년이 넘어가는 거 있죠. 와우. 사실 내가 「건지 아일랜드 감자껍질 파이클럽」을 읽었던 해는, 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심각한 우울과 좌절을 겪었던 때이기도 했고 여러 책 속으로 가장 깊이 도피했던 시기이기도 했어요.

그러니까 줄리엣은 그때의 나를 건져주었던 고마운 사람 중 하나이기도 한 거죠. 때로는 현실의 사람보다 종잇장 너머 존재하는 친구가 더 나를 잘 알 것만 같거든요. 그때가 정확히 그런 시절이었고, 그래서 줄리엣의 우당탕한... 이야기는 퍽 위로가 되었고 다시 잘 살아보고 싶은 그런 용기를 주었다는 말을 전하고 싶었어요. 줄리엣이 글로써 팍팍한 시절을 살던 사람들에게 위안을 주고 웃음을 주었던 것처럼, 줄리엣의 이야기가 내게는 그랬거든요.


바로 그 점이 제가 독서를 좋아하는 이유입니다. 작은 관심 하나로 책 한 권을 읽게 되고, 그 책 안에서 발견한 작은 흥미 때문에 그 다음 책을 읽게 되고, 거기서 찾아낸 것 때문에 또다시 다음 책을 읽게 되는 거죠. 그렇게 해서 독서는 기하급수적으로 진행됩니다. 거기에는 가시적인 한계도 없으며, 순수한 즐거움 외에는 다른 이유도 없습니다. -25쪽


그러니까 말예요. 당신이 말한 정확히 바로 그 이유로 나는 줄리엣 애쉬튼, 당신에게 더 관심을 가지게 됐는데 그건 바로 이 문장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오클리 가에 있던 집은 1945년 폭격으로 사라졌는데, 아직도 그 집이 그립습니다. 오클리 가는 훌륭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26쪽


내게 런던의 오클리 가는 정확히 세 사람과 연결되는 창구입니다. 퍼넬로피 킬링(스턴), 어슐라 토드. 심지어 시기도 같아요, 2차 대전 때 독일이 런던에 대규모 폭격을 퍼부었던 바로 그 시기죠. 당시의 첼시 지역에 유달리 피해가 컸던 것인지 그것까지는 잘 모르겠어요. 어쨌건 내게 당시의 오클리 가에서 죽은 사람들과 집을 잃은 사람들이 절로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에요.

이렇게 거창하게 말했지만 정작 런던에 갔을 때 오클리 가를 가보지는 못했지만요. 물론 그곳에 연결된 인물을 더 찾기 위해 첼시, 런던이 배경이 되는 책을 일부러 더 찾아보지는 않았지만(그러기엔 이미 쌓여있는 숙제 같은 책더미가 어마어마해요) 그럼에도, 어쩐지 좀 더 잘 알 것 같은 사람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어서 기분이 반짝반짝해진다니까요. 무슨 말이냐고요? 알잖아요, 알 걸요.


전후에 등화관제가 사라진 런던의 밤길을 걸을 때 집집마다 새어 나오는 불빛을 보며,


그들의 책장이나 책상, 혹은 불 켜진 초, 혹은 밝은 색 소파 쿠션을 흘끗 보는 것만으로 나는 그들의 삶 전체를 상상하거든요. 30쪽


이런 공상을 하는 당신이 건지 섬에 사는 북클럽 회원들과 특이한 인연으로 편지 교류를 하게 됐을 때, 마침내 그 섬에 갈 특별한 이유를 발견했을 때 얼마나 신나 했을지, 얼마나 들떠 행복했을지는 능히 상상이 가요. 당신에게 열정적으로 구애한 성공한 출판업자 마크 레이놀즈를 종래에는 뻥- 차버렸을 정도로. 그러니 절친 소피의 오빠 시드니가 얼마나 안도했을지도 알겠다니까요. 시드니가 소피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이 정도로 당신을 걱정하고 있었단 말이죠.


명확하게 말할 수 있는 게 한 가지 있어. 도시는 마크 레이놀즈 같은 남자 수십 명만큼의 가치가 있다. (...) 그는 매력이 철철 넘치고 윤기가 줄줄 흐르며, 자신이 원하는 것은 손에 넣는 사람이야. 그것이 그 남자가 가진 몇 안 되는 원칙 중 하나지. 그가 줄리엣을 원하는 건 줄리엣이 예쁘면서 '지성적'이기 때문에, 그녀를 얻으면 다른 사람들의 부러움을 사는 커플이 될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야. 그 남자와 결혼한다면, 줄리엣의 인생은 극장이나 클럽이나 주말여행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으로 점철될 테고, 다시는 책을 쓸 수 없을 거야. 편집자로서 말한다면 나는 이런 상황이 싫다. -345쪽


그런데요 줄리엣,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어요. 그래서 당신 덕분에 찰스 램부터 시작해서 책을 퍽 좋아하게 됐을 미스터 도시 애덤스와 살게 되면서 책 정리는 어떻게 하기로 했나요? 두 사람의 서가에서는 분명 겹치는 책도 있을 것 같거든요. 물론 당신이 좀 더 어리고 뭘 몰랐던 시절에 결혼할 뻔했던 남자가 당신의 책을 모조리 포장해서 지하실로 치워버렸던 그런 엄청난 대형사고가 발생했을 리 없다는 건 알지만, 겹치는 책이 많이 나오는 건 그건 그것대로 좀 머리 아픈 일이거든요(겪어봐서 알아요).

앤 패디먼의 「서재 결혼시키기」, 당신이라면 이 책 정말 좋아할 거고 깔깔거리며 읽을 거라는 걸 확신할 수 있는데 패디먼은 1953년 생이예요, 안타깝게도. 아니 뭐 애초에 픽션 세계의 당신에게 앤 패디먼의 책을 읽힐 방도 같은 건 없지만. 하지만 정말 안타깝긴 하네요. 당신이 좋아할 만한 책이 꽤 많이 생각나거든요. 하지만 묻어둬야겠네요, 그렇죠?


어디서든 재기 발랄한 글을 쓰며 재미난 책을 찾으려고 눈에 불을 켜고 있을 것 같은 줄리엣, 어디에선가 또 만나요!


[제가 인용한 본문은 매직하우스 출판사에서 나온 구판이라 인용문과 페이지 수가 현재 유통되는 아래의 책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http://aladin.kr/p/UKnZ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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