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드 창, 당신 인생의 이야기
세계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점을 얻게 된 루이즈, 안녕하세요. 인사말을 쓰면서 생각합니다. 과연 안녕하냐는 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하고요. 내가 알던 안온하고 '변하지 않는' 세계에 거주하고 있는 나 역시 어제와 별다를 바 없이 똑같이 존재하는 것을 묻는 것일까요. 단지 친밀감을 확인하고 안부를 주고받는 것에서 끝나는 안녕의 인사는 어쩌면, 생각보다 훨씬 더 복잡한 이야깃거리를 끄집어낼 수 있는 화제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요. 또는 누군가의 화두가 될 수 있을지도요.
당신 인생의 이야기, 이 얼마나 직관적이고 정직한 제목일까요. 그래요, 저는 당신 인생의 이야기를 또다시 읽은 참입니다. 이것은 언어학자 루이즈 뱅크스의 이야기인 동시에 당신이 죽었으며 살아 있는, 태어나게 될 딸에게 헵타포드 heptapod적으로 구술하며 동시에 서술하고 있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어떤 이야기들은 거듭 읽었을 때에만, 그것도 해당 분야의 지식이 조금 더 조밀하게 쌓인 뒤에 다시 읽었을 때에야 숨어 있던 풍성한 결들을 드러내는 마법을 부리곤 합니다. 어쩌면 그건 마법이 아니라 놀라운 기술- 문학적 기술이건 이 이야기에 끌어들인 언어와 과학적 지식의 층위가 비로소 펼쳐 보인 세계의 깊이 때문이기도 하겠죠. 그건 처음 읽었을 때는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팝업 페이지를 뒤늦게 발견해서 펼쳐보고 입이 떡 벌어지도록 놀란 것과 퍽 비슷한 느낌입니다.
전체 400여 쪽에 달하는 두꺼운 책 속에서 고작 75쪽 남짓한 당신의 이야기에서 발견할 수 있었던 감정의 편린들을 모조리 건져 쏟아보려는 시도를 했습니다. 별 의미 없는 짓이었다는 건 건져낸 단어들을 본 이후였습니다. 비애, 경이, 애틋함, 애정, 순리, 또... 아, 너무 많아요. 많고 또 추상적입니다. 그러니까 이건 결국 어떤 감정을 보여주느냐보다, 어떤 방식으로 보여주느냐가 훨씬 더 중요한 이야기였던 거예요. 물론 대부분의 소설이 그러합니다마는 이 작가의 소설은 특히 더 그렇습니다.
루이즈, 참 이상하죠. 당신의 이야기는 흔히들 나누는 분류로 SF에 속합니다. SF를 정의하는 여러 요소들, 예컨대 사고실험이나 외삽의 요소들을 적극적으로 차용하고 있는 이 이야기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한 편의 장중한 고대 그리스 비극처럼 읽혀요. 닥쳐올 운명을 알면서도 그 운명 속으로 조금의 저항도 없이 성큼 걸어 들어가는 당신의 모습에서 제게 신탁처럼 주어진 비극적인 운명을 받아들이는 신화적 영웅들의 그림자를 발견하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그건 어떤 숭고한 비극을 배우와 더불어 살고 난 관객이 느끼는 카타르시스와 다르지 않아요.
언어는 각자의 고유한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나라의 고유어는 아주 세밀한 단어로 쪼개어서 마치 블록 조각처럼 이리 모으고 저리 모아 현상과 대상을 설명하기에 아주 적합합니다. 달리 말해 개인적인 목적 아래 최적화하기 쉬운 특정이 있죠. 또 어느 지역의 언어는 그보다는 덜 세밀하지만, 공동체적 경험을 표현하기에 적절하게 맞추어져 있기도 합니다. 집담의 경험과 공감을 유지하는 게 중요하다면 당연히 그런 식으로 발달하겠죠. 하지만 그 어떤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언어에는 공통점이 하나 있는데, 그건 인과관계로, 선형적으로 이어지는 특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언어를 연구해 온 언어학자인 당신에게 갑자기 지구에 나타난 외계인, 통칭 헵타포드의 언어를 연구해 달라는 의뢰가 왔을 때의 막막함을 상상해 봅니다. 하지만 도무지 어떤 문법으로 굴러가는지 조금의 짐작조차 가지 않는 그 언어의 구조를, 작동 원리를 마침내 깨닫게 되었을 때의 막막함은 아무것도 모를 때의 그 막막함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였으리라 생각해요. 내가 속한 세상을 지배하는 언어적 원리와 상충하는 언어를 마침내 습득하게 되었을 때, 그 언어의 존재 이유가 내가 지금껏 언어를 연구하고 구사해 왔던 이유-소통-와 전혀 다른 목적 아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의 그 충격이란 도대체 어떤 것이었을까요.
광선이 어떤 각도로 수면에 도달하고, 다른 각도로 수중을 나아가는 현상을 생각해 보자. 굴절률의 차이 때문에 빛이 방향을 바꿨다고 설명한다면, 인류의 관점에서 세계를 보고 있다는 얘기가 된다. 빛이 목적지에 도달하는 시간을 최소화했다고 설명한다면 당신은 헵타포드의 관점에서 세계를 보고 있는 것이다. 완전히 다른 두 가지의 해석이다.
물질 우주는 완벽하게 양의적인 문법을 가진 하나의 언어이다. 모든 물리적 사건은 두 가지의 완전히 상이한 방식으로 분석할 수 있는 언술에 해당된다. 한 방식은 인과적이고, 다른 방식은 목적론적이다. -198쪽
이미 '목적지'를 통찰하고 그곳에 닿기 위한 과정을 기술하는 헵타포드의 언어를 습득한 당신에게 현실은 이제 다차원적으로 움직입니다. 과거와 현재, 미래가 동시에 각자의 궤도에서 움직입니다. 당신의 언어를 구성하는 세계가 다층적이 되었기에 당신은 소통하는 언어와 수행하는 언어를 모두 구사하게 됐죠. 당신은 훗날 태어날 딸에게 어떤 비극이 닥칠지 알면서도, 그 미래를 향해 성실하게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딛습니다. 왜냐하면 루이즈, 당신은 헵타포드적 언어 체계를 내면화한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죠.
헵타포드의 경우 모든 언어는 수행문이다. 정보 전달을 위해 언어를 쓰는 대신, 그들은 현실화를 위해 언어를 쓴다. -205쪽
그것이 설령 딸의 죽음을 증명하게 되는 순간이 닥쳐오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더라도 변하는 건 없습니다. 그러므로 아이를 갖고 싶냐는 남편의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하는 당신을 보며 주어진 숙명을 의연하게 받아들이는 비극의 주인공들에게서 받았던 숭엄한 아름다움을, 감동을 느끼지 않을 수는 없는 거죠.
벌써 여러 통의 편지를 써봤지만 이렇게 쓰기 힘들었던 편지는 처음인 것 같습니다. 미래를 알면서도 그것을 모르는 것처럼, 결정론적인 언어관을 가진 채로 아무렇지도 않은 척 삶을 이어나가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는 여전히 모르겠어요. 어쩌면 알고 싶지 않은 것인지도 모르고요. 그러나 여전히 당신의 삶을 존경합니다.
누구도 하지 못할 일을 해낸 사람, 뭐라고 불러야 좋을까요. 모르겠네요. 정말로 모르겠습니다. 평안하시기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