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비된 리더가 정말 존재할까

리처드 애덤스, 워터십 다운의 열한 마리 토끼

by 담화

hey, Hazel. 안녕 귀여운 족장 토끼 헤이즐 님.


편지를 시작하기에 앞서, 우선 나는 토끼를 그래도 꽤 잘 아는 축에 속한다는 걸 미리 말해둘게. 아, 정확히는 그냥 토끼의 생태에 대해서이려나. 그건 내가 토끼를 퍽 오래 길렀기 때문이기도 해. 물론 내가 길렀던 토끼는 널 위시해서 용맹하기 짝이 없는 야생 토끼들과는 달라도 억만 광년쯤 다른 종이긴 하지만, 뭐랄까, 너희가 놀랐을 때 하는 행동이나 잘 때, 먹을 때, 불안하거나 마음이 편안할 때 어떤 표정이고 어떤 자세를 취하는지 나는 지금도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거든. 내가 유달리 워터십 다운의 토끼들을 진짜처럼 느꼈던 건 그런 경험에 힘입은 바가 적지 않다고 생각해.


사실 난 이 책으로 너희 이야기를 읽기 훨씬 오래전에, 일종의... 다이제스트본이랄까, 그런 형식으로 출간됐던 워터십 다운을 읽은 적이 있었어. 그 책에는 파이버 fiver, 헤이즐, 빅윅 big wig 같은 토끼 이름들이 엄청 귀여운 우리말로 번역돼 있었거든. 이를테면 닷찌, 개암이, 더벅머리 등등. 닷찌를 파이버로 다시 기억하는 데는 약간의 버퍼링이 있긴 했지만... 그래도 어쨌든 이젠 더 이상 닷찌라고 부르지는 않게 된 거 같아. 사실 아무리 한 편의 이야기가 물 건너 다른 나라 말로 옮겨진다 해도, 이름만큼은 고유명사니까 옮기지 않는 게 맞다고는 생각하는데 나는 그 귀여운 이름에 굉장히 친숙해져 있었던 것 같더라고. 아무튼.


파이버는 일종의 예지자랄까 선각자랄까, 그런 존재였지. 예지자가 맞으려나. 그래서 너희가 무리 지어 살고 있던 곳에 불길한 일이 닥칠 거라는 걸 예감한 파이버는 당장 이곳을 떠나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했지만 뭐... 사람이나 토끼나, 사회 구성원들 중에서도 가장 힘이 없는 존재들의 발언이란 게 얼마나 무력한지는 우리 피차 다 잘 아는 얘기잖아. 그러니 누가 귀 기울여 들었겠어, 파이버의 말을.


"나도 뭔지는 몰라. 지금 당장은 위험하지 않아. 하지만 곧 닥쳐올 거야...... 점점 다가오고 있다고. 헤이즐, 저것 봐! 들판이 온통 피바다야!" -28쪽


아, 토끼가 인간의 문자를 모른다는 게 (적어도 지금은 토끼에게 감정이입한 독자의 입장에서) 이렇게 안타까울 수가 없지. 불과 몇 문단 뒤에 이런 단락이 등장한단 말야.


최상급 7.300평 택지를 포함한 목 좋은 이 부지는 버크셔 주 뉴버리 시의 서치 앤드 마틴 주식회사에서 신식 고급 주택 지구로 개발할 예정임. -29쪽


그러니까 파이버의 예지가 맞았어. 너희가 살던 너른 땅은 곧 파헤쳐지고 수많은 토끼들이 죽어나가게 될 테니까. 불행 중 다행으로 파이버와 네 말에 귀를 기울인 토끼들 몇몇이 새로운 터전을 찾기 위한 대장정을 떠나게 되지. 그 길이 얼마나 험난하든 불도저와 굴착기가 헤집어버릴 땅보다야 나을 테지만, 토끼 입장에서- 그것도 무엇 하나 확신할 수 없는 불안을 떠안고 먼 길을 떠나야 했을 때 얼마나 많은 용기와 각오가 필요했을지 생각하면 좀 아득해져. 이런 말, 좀 그렇긴 하지만 인간은 야생 동물에게 그리 친절하지 않거든.


이건 기본적으로는 모험담이지만, 정치적 우화이기도 하고 영웅 서사시처럼 느껴지기도 해. 일종의 건국 신화처럼 읽히기도 하고.


맘 놓고 살 수 있는 땅을 찾아 기존의 사회를 떠난 집단이 마침내 이상적인 민주 공동체를 설립하기까지 만나는 기만적으로 안락한 사회와 극히 전체주의적인 사회와 극명하게 대비되는 걸 보면 이게 과연 아이들을 위한 동화가 맞긴 한가 궁금해지기까지 하거든. 하지만 늘 그렇듯 좋은 이야기는 많은 상징과 해석의 여지를 품고 있게 마련이니, 너희들의 이야기가 바로 그렇다는 증거이기도 한 거겠지. 게다가 엘-어라이라의 신화는 또 어떻고. 하나의 집단이 단단하게 결속되는 데 필요한 게 바로 그거잖아. 게다가 아무리 되풀이해도 질리는 법 없이 즐겁기까지 하지. 그런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아마도 너희는 힘겹기 짝이 없었을 여정을 견뎠을 테고.


리더란 뭘까, 헤이즐.


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여러 번 발견할 수 있어. 전혀 카리스마적이지도 않고, 굳건한 의지 하나로 친구들을 이끄는 믿음직한 모습보다는 오히려 종종 당황하고, 우왕좌왕하며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는 너를 보며 리더가 뭘까 생각해. 사실 나도 잘 몰라. 세간에서 아주 당연하다는 듯 이야기하는, 모름지기 리더란 이래야지- 하는 말들에 가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내심으로는 정말? 하고 물음표를 품고 돌아설 때도 있거든. 확신보다 회의하는 사람. 나는 그런 사람이 하는 말에 종종 끌리곤 하는데, 지나친 회의론자도 뭐...... 그리 좋은 리더는 아닐지도 모르겠어. 그런데 이거 하나는 알아. 모두가 같은 정의 definition을 주창하고, 거기에 동의하고 있다면 그건 좀 많이 이상한 거야. 그렇지 않아?


스스로가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무작정 밀어붙이지 않고 공들여 동료 토끼들을 설득하려고 애쓴 너를 봤어. 틀림없이 성공할 거라 생각하고 세운 계획을 막상 실행에 옮기고 있을 때 치밀어 오르는 불안감과 싸우며 처음에 그렸던 성공을 향해 애써 나아가고 또 나아가는 너를 봤지.

나 자신도 믿기 힘든 이상을 이루려고 함께 싸우는 친구들을 온전히 믿고, 도망치고 싶어지는 자신을 채찍질해서 앞으로 움직이는 건 말로 하기는 쉽지만 실제로 그렇게 하기는 굉장히 어려워.

그래서 가끔, 사람들은 그런 특별한 사람을 훌륭한 지도자를 넘어서 영웅이라고 부르기도 해. 나는 너한테서 그걸 봤어. 여러 의미에서, 너는 진짜 대단한 토끼이고 영웅적인 토끼였어. 그래서 네가 오래오래 살았으면 좋겠어. 그러니까, 세상에서 말야. 이런 토끼가 있다고, 이런 이야기가 있다는 의미로.

더 오래 살아줘, 헤이즐-라.


(-라는 토끼어에서 보통 접미사로, 우두머리나 족장 토끼에게 붙이는 존칭의 의미로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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