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렴하게 세계를 짓기 위해서

김보영, 저예산 프로젝트

by 담화

안녕, 세연 씨. 평안하신가요.


같은 사람을 다른 책에서 또다시 만나는 건 퍽 드문 우연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몇 년 전 꽤 즐겁게 읽었던 소설집이 아니라 신간에서 당신을 발견하고는, 어... 음... 잠시 고민을 했더랬죠. 나 이거 아는 건데. 이 사람 아는데. 그런데 신기하게도 세연 씨의 분투기가 그때와 달리 읽히는 건 지금의 내가 세연 씨와 퍽 비슷한 포지션(?)에 처했기 때문이겠죠. 마이너 외길을 걷는, 남들은 알아주지 않지만 아주 사소한 디테일 하나를 더해놓고 즐거워하는, 그리고 내가 직조한 세계에 초대할 사람들을 생각하며 고심하고 또 고심하는 그런 자리 말이에요. 사람이란 게 이래요. 꼭 그 비슷한 처지에 놓여봐야만 달리 보이는 것들이 있어요.


돈이 없어서, 그놈의 돈이 없어서 원하는 만큼의 자본을 투입할 수 없는 막막한 상황 하에서도 최선을 다해 멋진 게임을 만들려고 고심하며 머리를 싸맸던 세연 씨. 어릴 때부터 게임만이 줄 수 있는 어떤 것에 푹 빠져 있던 세연 씨. 그래서 게임을 만들지 않고는 배길 수 없었던 세연 씨. 검열을 피해 게임을 찾던 아이들 사이에서 유명세를 탔던 인디 게임을 홀로 만들었던, 메시지 창 하나로 히든 시나리오까지 밀어 넣은 그 게임으로 인해 '미친놈' 타이틀을 거머쥐었던 세연 씨.


"우리 인생도 선택으로 가득해. 하지만 그래봤자 내가 내 인생의 주인공이란 생각은 들지 않는다고. 왜냐하면 어차피 평생 갈 수 있는 길이 하나뿐이라면 결국 안전한 선택을 할 수밖에 없으니까......
(...)
그렇게 우리는 다 자신의 인생에서 소외되는 거야......
하지만 게임은 그렇지 않아. 선택지가 나타났을 때 알게 되는 거야. '나는 저 모든 길을 다 갈 수 있겠구나' 세계의 이면을 다 보고, 모든 가능성의 경로와 결과를 다 볼 수 있겠구나.....
그걸 알게 되는 순간 내 게임을 하는 사람은 세계의 주인공이 되는 거야. 그게 바로 게임이야. 그게 진짜 게임 시나리오라고." -46쪽


아마도 당신의 팬이리라 생각되는 게이머의 말을 빌자면,


"이세연 게임은 그런 걸 넣죠. 그래픽이 아니라 문자 몇 줄로 몰입을 시키죠. 글자만으로요. 장인 정신이랄......" -55쪽


이 사람이 그런 감동을 느꼈던 건, 무엇보다도 스스로 고안해 낸 세계의 '입주민'이 그곳을 진실한 장소로 느끼도록, 소속감을 느낄 수 있게끔 수없이 고민했을 세연 씨의 노력 덕분이었을 거예요. 항상 치열하게 생각했잖아요. 도대체 어떻게 하면 조금 더 '몰입감을 느끼게 할 수 있을지, 이 상황이 있을 법한 것이라고 믿게 할지'. 이건 어쩌면 세연 씨 삶의 평생의 화두였겠죠.


그래서 당신은 때로는 성문화되어 존재하는 건 아닐지라도 분명 그곳에 존재하는 장르적 문법을 기꺼이 무시하는 파격을 벌이기도 하고, 은근슬쩍 외주 작업물에 자신의 게임 이벤트를 밀어 넣는 일도 했죠. 상호 협약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의 그런 일에 대한 옳고 그름은 내가 말할 일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그저 컨텐츠 감상자 혹은 플레이어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내가 좋아했던 작품의 주인공을 상상조차 하지 못한 곳에서 조우하는 건 사실 전혀 기대하지 못했던 깜짝 선물을 받는 것처럼 굉장히 반갑고 기뻤을 것 같아요. 전자에 대해서라면, 그건 어쩐지 마이너 추종자로서... 이해할 것만 같아서 그냥 눈물만 닦고 넘어갈게요.


그랬었지. 잘 짠 몇 개의 퀘스트가 게임 전체를 빛나게 한다고. 유저는 시나리오의 평균값을 체험한다고. 그것도 시나리오 작가 혼자 생각해야 하는 일 중 하나였다. 게임을 잘 살펴 몇 마디의 대사로 모순을 없앨 것. 시스템이 만드는 괴리를 시나리오로 풀처럼 발라 메울 것. 그렇게 모순이 없어지면 몰입감이 생긴다. 그래서, 절대로, 유저를 게임에서 소외시키지 말 것. -74쪽


사실은요, 세연 씨, 내가 근 2주 동안 매달려 있던 일이 바로 이거였어요. 크고 작은 덩어리로 엉기어 있는 이야기들 사이를 조밀하게 메꾸고 매끈하게 다듬는 거요. 여기를 꾹 눌러 밀어 넣은 다음 반대편에서 지나치게 삐져나온 부분이 있으면 또 손바닥으로 문질러 반질반질하게 다듬는 것 같은 그런 작업 말이에요. 너무 힘든데요, 정말 어깨가 빠질 것 같고 눈이 빠질 것처럼 힘든데 그런데 그 형태가 선명하게 드러나는 순간의 말로 표현하지 못할 충족감이 있어요. 굉장히 중독적인 성취감이죠. 세연 씨가 결코 양보하지 못했던, 같이 일하던 사람들이 진저리를 낼 정도로 도망갈 정도로 타협하지 못했던 부분이기도 하죠. 그런데 한편으론 그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세연 씨가 그렇게까지 사용자 경험을 중시하고, 몰입감을 높이기 위해 필사적으로 매달리게 만들었던 가장 큰 압력이 바로 저예산 이슈가 아니었을까 하는. 아이러니죠. 그런 압력이 결과적으로는 한 사람의 창작자의 가장 월등한 능력치를 뽑아낸다는 사실이.


세연 씨의 작품이 널리 알려지진 못했을지 몰라도, 코어 팬은 분명히 있었어요. 정말로요. 가끔은 우리끼리 우스개로 자조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한줌단의 존재는 얼마나 소중한가요. 그들은 여전히 세연 씨의 다음 작품을 기다리고 있을 텐데. 그렇게 이곳에서, 저곳에서, 그래도 그 게임이... 하고 가끔씩은 세연 씨를 떠올릴 텐데.


간혹, 어쩌다 가끔 힘들 때는 또다시 세연 씨를 찾아올지도 모르겠어요. 징징거리는 소리를 할지도 모르죠. 그래도 괜찮아요? 괜찮다고 해 줄래요?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64232445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35897927




이전 18화한없이 끝없이 착한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