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말을 익숙한 언어로 옮겨주기

황석희, 번역 : 황석희

by 담화

일단, 모든 이야기에 앞서.

나는 황석희 번역가님을 잘 몰랐다. 영화 번역으로 유명세를 얻은 분이라고 하는데, 내가 한참 영화를 열심히 볼 때에는 (그러니까 엄청나게 옛날에는...) 영화 번역은 곧 이미도였던 때였던 까닭이다. 이 분께 관심을 갖게 된 건 순전히 때 되면 반드시 챙겨보는 유튜브 채널 [최성운의 사고실험] 덕분이다. 아는 분이 나오는 게 아닐 때는 영상을 틀어두고 다른 잔일거리를 찾아 손에 쥐곤 하는데 황석희 번역가님이 최PD님과 이야기를 주고받기 시작한 순간 도리 없이 영상을 틀어둔 TV에 시선을 고정하고 말았다. 절로 귀를 당기는 어조와 음성, 속도를 적절하게 유지면서 말하는 분들의 목소리를 듣게 될 때면 여지없이 발병하곤 하는 증상인데 그건 그들의 말하는 태도와 표정이 궁금하기 때문이다. 특히, 그 '꾸역꾸역' 이야기를 하실 때는 나도 모르게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게 되고야 말더란 것.


http://aladin.kr/p/bQ4dE


이 분의 평소 신조가 꾸역꾸역이라면 나는 사촌쯤 되는 '꾸준히'를 강령처럼 새기며 사는 사람인데, 그건 무슨 대단한 재능을 타고났건 꾸준히 하는 놈을 이기기는 쉽지 않다고 생각하는 덕도 있고, 그렇게 오랜 세월 쌓아온 것이 엄청나게 가치 있어지기는커녕 허송세월한 것이 되어버리는 슬픈 경우도 왕왕 있긴 하지만 쌓아본 저력은 그대로 있다는 사실을 알기에 그렇기도 하다. 여하간 그런 '꾸준히'가 둘러 안고 있는 관심사는 생각 외로 넓고 많기도 한데 그중의 하나가 번역이다. 한때 기술번역을 꽤 하기도 했었고, 해외생활을 하면서 언어를 공유하지 않는 사람과 의사소통을 넘어 '교류'한다는 것의 의미를 깊이 생각하는 기회를 여러 번 겪기도 했었기에 그런 듯도 싶다.

그리고 살짝 좀 솔직해져 보자면, 심지어 가족이라 해도 그들의 말을 나의 언어로 번역해야만 하는 경우가 더러 생기기도 하는 걸 부정할 수가 없다. 그러니까 아무리 같은 언어를 사용한들, 나 아닌 사람은 나와 의미 체계를 완벽하게 공유하지 않기에 종종 소통 오류가 일어날밖에. 우리가 그걸로 얼마나 많이 싸우냔 말이다... 내가 괜찮다고 하는 것은 정말로 괜찮은 게 아니고 너 똑바로 못하겠냐, 뭐 이런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거 우리 다 아는 거잖아요... 큼큼.


번역가는 발신자와 수신자 사이에서 그 언어를 가장 적확학 형태로 옮겨야 하는 사람이며, 거기엔 언제나 특별한 제약과 형식이 따르게 마련이다. 통역가라면 제한된 발화 시간일 테고 번역가라면 한정된 페이지와 마감 기한처럼. 영상 번역가도 다르지 않아서, 그 제약은 줄은 두 줄이며 한 줄당 몇... 글자였더라... 아무튼 정해져 있다고 한다(당연하겠지만). 정해진 규칙 안에서 인물의 캐릭터성을 해치지 않고, 우리말 어감도 자연스럽고, 맞춤법과 띄어쓰기도 맞추며 의미도 빠짐없이 전달하는 일이 가능할까? 진심으로 이게 가능할까? 내가 보기엔 미션 임파서블이 따로 없다. 그러나 불가능합니다고 뭐고, 한국인의 프로 정신에 그딴 건 없다(내가 겪어본 바로도 없더라... 눈물...). 그렇게 아득바득 내놓은 '정답일 수는 없겠지만 최선을 다한' 번역은, 또 한 유식함 하시는 관객들의 무한한 삿대질과 비난을 감수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에세이에서 읽게 될 것이 대충 어떤 내용이리라는 것을 충분히 유추할 수 있다. 손수건을 준비해야 할 필요까지는 없겠지만, 그래도 한 분야에서 최소 십여 년 이상을 분투하신 전문가의 고충에 공감할 수 있는 마음 정도는 준비하면 좋을 듯싶다.


그래서, 결론은 오역이고 뭐고 못 잡는다. 못 잡는다기보다 귀에 거슬리는 게 스쳐가더라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넘어간다. 오역은 날파리와 마찬가지로 미스터리하게 자연 발생하는 존재라 생각하는 게 마음 편하기도 하고. -51쪽
"좋은 번역은 완벽하게 투명한 유리 같아야 한다는 통념이 있지만, 진정 훌륭한 번역은 현실의 거울처럼 작은 얼룩들과 결함들이 있는 번역이다." -100쪽
어쩌면 영화 번역가라는 사람은 문장의 뜻을 옮기는 게 아니라 문장의 뉘앙스를 옮기는 사람이 아닐까 하고. 어찌 됐건 문장 해석이야 그리 어렵지만 않으면 대학생들도 할 수 있으니까. 경험을 근거로 이 문장이 풍기는 뉘앙스의 냄새를 맡는 것. 감독이 아닌 이상 정확한 뉘앙스를 알 순 없지만 정확에 근접한 뉘앙스를 포착해 내는 것. 그게 영화 번역가의 일인 것만 같다. -17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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