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이케 마리코, 달밤 숲속의 올빼미
애도란 도대체 무엇일까. 이 책을 접하기 전, 그리고 책을 덮은 뒤의 질문은 뜻밖에도 같았다. 누군가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영원히 떠났음을 인정하고서야 비로소 애도의 첫발을 뗀 것이라는 사실을 나는 올여름 또 한 번 깨달았더랬다. 마지막 떠남의 장소에서 가지 마, 를 온몸으로 부르짖으며 무너져 내리는 사람들 가운데서 아주 따갑게 그리고 무디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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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애도하는 사람이 남아있는 죽음은 그나마 덜 쓸쓸하다. 지극히 외롭고 고독한 마지막 가는 길을 본 경험이 있어서일까 이렇듯 상실을 토로하며 슬픔을 말하는 이가 그리워하는 사람은 정말이지 살아있는 동안 행복했겠구나 그런 생각이 절로 든다.
저자는 호러소설로 매우 유명한 작가이기도 하다. 폐암 4기를 선고받고 짧은 암투병을 견디다 세상을 떠난 그의 남편도, 본인도 나오키 상을 수상한 바 있는 부부 작가이기도 했다. 같은 일을 하는 동료로서 나눌 수 있는 동지애가 있었을 것이다. 가끔은 라이벌 의식을 불태우기도 하며 생의 동반자로서 서로가 주도권을 갖기 위해 혈투에 가까운 싸움을 벌인 일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언제 죽어도 좋아. 옛날부터 그렇게 생각해 왔어. 죽는 건 두렵지 않아. 하지만 생명체로서의 나는 아직 살고 싶어 해. 더 이상 살 수 없는 곳까지 와 버렸는데, 그게 참 이상하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가슴이 미어졌고 울음이 복받쳐 올랐다. -10쪽
담담하게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처럼 말하던 배우자가 그럼에도 역시 아직 살고 싶어,라고 고백해 올 때 어떤 표정을 짓고 어떤 말로 위로를 해야 하는 것인지 운 좋게도 나는 모른다. 그러나 이런 일에 정답 따위가 있을 리 없다. 무수한 오답만이, 그럼에도 진심에 가 닿는 오답이 존재할 것이다. 유사한 아픔의 경험이 있는 사람만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겠지.
그렇게 남편을 떠나보낸 저자는 평소 잘 알고 지내던 편집자로부터 죽은 남편에 대한 글을 연재해 보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받는다. 글쎄, 이런 제안을 받았을 때 저자의 기분이 어땠을지는 알 수 없다. 기획 의도야 어땠든 간에, 같은 아픔을 지닌 사람들과 공감대를 형성하고 서로에게 위로를 주고받을 수 있는 따뜻한 장으로서 남게 되어서 다행이라고 할밖에. 후기에 저자가 썼듯,
슬픔을 어떻게 극복하는지, 어떻게 다시 살아 내는지, 그 방법을 나는 모른다. 도저히 알 수가 없다. 그렇게 모르는 채로, '모른다는 것' 그 자체를 쓰고자 했고, 그렇게 써 왔다. -214쪽
무엇을 알아서 쓴 글이 아니다. 어떤 목적을 두고 쓴 글 역시 아니다. 그저 슬픔의 한가운데서 익사하지 않기 위해서 '모르지만', 떠난 사람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하루하루를 어떻게 살았는지를 말한다. 늘 같은 일상인 듯 하지만 종종 넋을 잃고 그리운 이를 생각하고, 그와 함께 있었던 삶의 순간들을 복기하며 울다 웃으며 그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 일수를 습관처럼 헤아린다. 담백한 문장으로 남은 슬픔의 기록은 때론 한 곳에 우묵하게 고여 웅덩이를 만들기도 하고 아주 가벼운 그늘만을 남기고 산뜻하게 날아가 버리기도 한다.
며칠 전, 혼자서 커다란 도라야키를 먹다가 그 이야기가 문득 떠올랐다. 우습고 또 우스워서 혼자 깔깔대다가 정신 차려 보니 오열하고 있었다. 웃으며 오열하는 데 복근이 꽤 쓰인다는 사실을 그날 처음 알았다. -15쪽
상실이라는 이름의 막은 언젠가 분명 돌비늘처럼 얇게 벗겨져 떨어져 나갈 것이다. -106쪽
상실은 그런 식으로 그가 떠나고 없는 시간 곳곳에 크고 작은 구멍을 내며 남은 이가 걸어가야 할 시간을 한 발짝 앞서 간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인가 보다.
마냥 비통하기만 한 것도, 서럽기만 한 것도 아니고 가끔 애달프기도 한 것. 울다가 웃다가 하게 하며 기어코 어룽진 눈물을 뚝 떨구게 하는 그 모든 것이 애도라는 것을 전하는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