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도 안 먹었는데 왜 잊었는데

권여선, 술꾼들의 모국어

by 담화

이렇게까지 당혹스러울 수가.


이 책을 덮고 난 후의 솔직한 감상이었다. 책이 내게 당혹감을 안겼냐, 그렇다. 글이 별로였나? 전혀 아니다. 다 읽고 나서 보니 안 좋아하는 작가였다던가? 전혀, 그럴 리가 있나. 나의 황망함은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완벽한 나의 망각에서 비롯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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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은 책들을 다 기억하지 못할까 봐 걱정된다는 걱정을 하는 사람들에게 책 좀 읽으셨다는 분들이 하나같이 하시는 말씀이 있다. 걱정 마세요, 저도 많이 잊어버려요.

그 말에 심히 동의하는 바이고, 읽은 책을 잊어버릴까 두려워서 책을 안 읽는 사람도 아니건만 한 번 읽었던 책을 이토록 완벽하게 망각하고 개정판을 읽으면서 마치 처음 읽는 책을 보는 것처럼 재미있어 할 수도 있나. 있었다. 그 사람이 바로 나예요(orz...)


제목을 근사하게 바꾼 개정판 탓을 하자.


... 할 수 있을 리가 있나.


아무튼 그렇게, 순식간에 이 에세이를 즐겁게 다 읽어버렸던 나는 이것이 몇 년 전 이미 읽었던 「오늘 뭐 먹지」의 개정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대략 10여 초간을 멍하니 허공만 바라보았다.


기억력이 분명히 예전만 못한 것도 사실이고, 이 책이 저 책이었던가 오락가락하는 일이 부지기수로 일어나지만 이렇게까지 통째로 다 잊어버린 것은 처음이라 정말로 당혹스러웠다. 아마도 이것은 리뷰를 써두지 않았던 탓일 거라고 생각하며(무슨 말을 썼건 여하간 글로 남겨놓는 순간 책 내용은 머리에도 남고 가슴에도 남는다) 이젠 두 번 같은 실수는 하지 않겠노라 결의를 다진다.


다시, 각설하고.


권여선 작가의 책을 펼칠 때는 어쩐지 어디선가 음식 냄새(more like 술냄새...?)가 난다는 듯한 착각이 들기도 하는데 이 책을 읽어보면 그게 아주 근거가 없는 생각은 아니었구나 하는 모종의 확신이 든다.

가족 중에 정확히 권여선 작가님과 100% 똑같은 분이 계시기 때문에, 어떤 음식을 마련해 식탁에 내어놓든 아이고 이거 안주로 딱인데, 하는 말을 무수히 들어 안다. 게다가 또 어떤 아이들은 부모의 어떤 모습을 질색하도록 싫어하면서도 닮는 경향이 없지 않다.

너무 돌려 말했는데 내가 바로 그런 아이였고, 부친이 매우 애주하시는 모습을 질리게 보면서 자란 남매 중 누나(=댓츠미)는 비슷하게 와 이거 뫄뫄랑 마시면 딱인데... 하는 성향으로 자랐고 동생은 아주 질색하는 사람이 되었다.

결론적으로 나는 모든 음식을 안주화하는 술꾼들의 모습을 징그럽게 싫어하는 동시에 절로 입맛을 다시는 술꾼의 심정에 동시 이입하는 별종으로 진화했다는 뜻이 되겠다. 그러니까 이 책은 뭐다, 안주 가이드가 되어버렸다, 그런 말씀.


굳이 음주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갖지 않아도 상관없지 않을까. 이 에세이의 핵심 키워드라면 단연 #술 #안주, 일 것이 당연하지만 여기에 #미식을 추가하고 싶다.


권여선 작가는 자타가 공인하는 술꾼(...)인 동시에 미식가임을 확고하게 인식시켜 주는 책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니, 술에 여러모로 좋지 않은 기억이 있는 독자라 해도 맛있는 음식을 더 맛있게 먹는 법이라든가, 지금껏 도무지 친근감이 가지 않아 멀리 했던 음식에 한 번쯤 눈길을 주어보고 싶은 너그러움이 생겼다면 그 순간 정말이지 반드시 펼쳐봐야 할 책이라고 하겠다.


하나의 음식이 곧 새로운 세계로의 초대장이고, 미각의 확장 또한 나라는 편협함을 내가 모르던 가능성의 영역으로 안내하는 마중물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말이다. 장담하건대 책을 덮고 나면 뭐라도 만들어 먹고 싶어지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을 것이다.


술꾼은 모든 음식을 안주로 일체화시킨다. 그래서 말인데 옛날 허름한 술집 문이나 벽에 붙어 있던 '안주 일체'라는 손글씨는 이 땅의 주정뱅이들에게 그 얼마나 간결한 진리의 메뉴였던가. -8쪽
나는 그날 두 가지의 깨달음을 얻었다. 선배들의 대붕 같은 뜻을 참새같이 방정맞은 내 생각으로 섣불리 재단해선 안 된다는 것. 그리고 만두는 더할 나위 없이 술과 잘 어울린다는 것. -33쪽
... 그 선배가 입에 거품과 면발을 동시에 물고 떠들기를, 이 집은 물냉면 전문집이고 비빔은 그저 구색일 뿐인데 이런 집에 와서 비빔을 시키는 것은 맛의 미음 자도 모르는 인간들이 저지르는 정신 나간 짓이며 하물며 해장을 하는데 국물이 없는 비빔이 가당키나 하냐는 것이었다. -7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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