짤막한 이야기를 쓰는 마음

김지연 외, 소설 보다 여름 2025

by 담화

지금은 단편소설을 아주 잘 읽지만, 전혀 읽지 못했던 때가 있었다. 아마도 그건 독자로서의 경력이 퍽 짧았기 때문일 거라 생각한다. 읽기와 친하지 않은 사람이 책, 특히 픽션과 친해지기 위해서는 짧은 글과 먼저 친해지는 게 좋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이건 경우에 따라서 옳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지 않은가 싶다.

투입해야 하는 자원, 그러니까 시간이나 집중력, 에너지 같은 것을 고려하자면 단연코 단편이 낫다. 그러나 주어진 텍스트를 판독하는 데서 끝나는 것이 독서의 목적이 아니지 않은가를 재고한다면 나는 아무래도 단편소설의 손을 들어주기가 힘들다.


장편소설은 페이지수가 진입장벽이라는 점만 제외한다면 책이 아닌 다른 매체를 통해서 서사의 기본 유형에 익숙해져 있는 대중이 가장 받아들이기 쉬운 형식을 갖추고 있다.


주인공이 무엇을 하고 싶어 하는지, 혹은 회피하는지가 대체로 초반부에 명백하게 드러나 있다(절대반지를 파괴하러 갑시다 하지만 왜 꼭 그게 저여야 하죠). 적대자가 누구이고 우군이 누구인지도 곧 드러난다. 주인공이 어떤 심리적인 위기를 맞이하는지를 (이렇게 말하니까 굉장히 음습한 것 같네) 기대하게 된다.

주인공의 심리적/물리적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몰입하지 않기가 더 어려울 지경이다. 읽는 사람이 이 세계에 빠져들 수밖에 없는 구멍이 곳곳에 치밀하게 파헤쳐져 있기 때문에 한 번 빠져들면 책을 덮을 때까지 속수무책으로 페이지를 넘기는 일이 곧잘 발생한다. 이것이 장편소설의 미덕이자 악덕이다.

대단히 실례되는 말이지만, 가끔은 지루한 묘사나 일견 자질구레해 보이는 사건을 슬쩍 흐린 눈으로 훑고 지나가도 전체적인 서사의 흐름을 파악하는 데는 크게 지장이 없기도 하다.


반면에 단편소설이란 정확히 그 대척점에 서 있는 문학 양식이다. 짧다. 물론 짧은데, 대부분의 단편소설은 엄청난 밀도를 자랑한다. 행간과 사소한 말 한마디, 인물의 습관 하나와 시선 하나에도 대부분 어떤 의미가 있다.

글을 통해 말해지고 있는 것보다, 말해지지 않은 것에 보다 중요한 의미가 담겨있는 경우가 대단히 많다. 많은 경우의 단편소설이 그렇고, 뫄뫄 문학상을 수상한 단편소설이라면… 농축의 농축의 농축을 거친 찐엑기스적 암시와 여기저기에 숨겨놓은 작가의 의도와 질문.zip을 찾아 알아서 독자가 직접 압축을 풀어야 하는 가능성은 더더욱 높다고 봐야 하지 않나 싶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단편집들이 상당히 청량해졌다. 어떤 말을 써야 부정적인 의미의 가볍다,라는 뜻을 내비치지 않으면서 ‘짧지만 묵직한’이라는 예의 무게감을 좀 덜어낼 수 있을지를 고심했는데 딱히 다른 표현이 생각나지 않아서 아쉽다.

아무튼, 예전처럼 골똘히 고민까지 하지 않아도 ‘아, 이거 뭔지 알 것 같아’라는 느낌을 주는 짧은 이야기가 많아진 것이 반갑다는 이야기였다. 굳이 구분하자면 그 이야기가 전달하고자 하는 인물의 감정에, 그가 처한 상황에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고 그 상황이 주는 자각이나 각성에 가까운 통찰을 안기는 이야기가 있는 듯하다.


그런 다양한 이야기를 맛깔나게 섞어놓은 기획으로 위즈덤하우스의 <위픽> 시리즈에 호감을 갖고 있었는데, 문학과지성사의 <소설 보다> 시리즈도 이번에 한 번 읽어보았다.

위픽은 꽤 많은 시리즈를 읽어봤는데 문지는 올해 여름 것밖에 아직 안 읽어봐서 판단은 보류해야 할 것 같다. 그러나 하나는 확실히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야기로서 훨씬 대중친화적인 쪽은 <위픽>이다. 그러나 소장욕구를 불러일으키는 쪽은 단연코 <소설 보다>라고 하겠다. 문지의 디자인팀에게 박수를…


<위픽>도 그렇긴 한데, <소설 보다>도 소설의 끝머리에 작가와의 인터뷰가 실려 있고 창작자들의 이야기에 늘 관심이 많은지라 소설보다도 오히려 이 인터뷰가 굉장히 흥미진진하게 읽히곤 하는데, 내가 읽은 이야기가 작가가 전하려고 했던 이야기와 얼마나 유사한지, 혹은 얼마나 거리가 떨어져 있는지를 확인하는 건 50%쯤 두근두근하고 50%쯤 불안불안하다.


어떤 이유에서든 부정적인 에너지를 내뿜는 사람에 대해서는 역시나 긍정적인 평가를 내릴 수 없겠지요. 어떤 이유에서든 부정적인 에너지를 그저 안으로 쌓아오기만 한 사람이 마침내 그걸 발산할 기회를 만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를 생각해보기도 했습니다. -47쪽


이와 같은 작가의 말 앞에서 내가 읽은 것과 바로 비교해 보는 마음은… 흡사 이런 것과 닮았다. 어린 날 칠판 앞에 불려 가 몇 번 문제를 풀어보라는 선생님의 말씀에 손을 달달 떨면서 해법을 적어나가는 것 같은 그런 마음과.

물론 하나의 이야기를 읽고 이해하는 데 정확히 하나의 옳은 방법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작가의 말이 항상 독자보다 옳은 것도 아니지만 그럼에도 내가 누군가의 의도를 정확히 읽지 못한 것만 같은 뜨끔한 그런 기분. 그런 게 싫어서 작가의 후기는 굳이 읽지 않는다는 사람도 있긴 하지만 나는 그런 게 좋아서, 내가 좋아한 글을 쓴 사람이 정말 쓰고 싶었던 것이 무엇인지가 너무 궁금해서 곧잘 작가의 글을 찾아보곤 하기 때문에 요즘처럼 단편소설 뒤에 작가 인터뷰가 함께 묶여 나오는 형식의 책이 반갑다.


모쪼록 생의 모든 행위가 수평적 움직임과 수직적 움직임을 내포한다면, 저 역시 두 움직임을(다소 불규칙적으로) 번갈아 겪으며 글을 써 왔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108쪽


이런 거 말이다...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657193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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