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식, 악마대학교
낙제를 각오했다 날벼락같은 특채를 당한 벨, 안녕. 안녕한 거, 맞죠?
우선 먹고사니즘의 굴레에 입성한 걸 축하합니다. 사는 게 만만치 않은 건 악마나 인간이나 진배없군요. 심심한 위로를 건넵니다.
그래도 그 뭐더라, 아. 창의융합 경진대회 발표를 무사히 마친 데다 그런 굉장히 성과를 얻었으니 위로보다는 역시 축하가 어울리지 않을까요. 그나저나 참, 악마 사회에서의 생존 경쟁도 이곳 못지않게 빡빡하다는 건 다른 작품을 통해서 엿본 적이 있어 대강은 알고 있었지만, 인간 대학생만큼이나 악마 대학생도 발표와 과제와 창의성 경쟁에 쫓긴다니 탄식을 금할 길이 없군요. 악마 체면이 있지, 경진대회가 뭡니까, 경진대회가.
아, 오해하지 마세요. 빈정거리는 거 아닙니다. 진짜 한탄하는 거예요. 계界가 다르면 뭐가 좀 다를 줄 알았더니 사는 건 다 똑같네요.
이러나저러나 당신이 당면한 곤란함을 잠시 구경할게요.
오늘은 그만큼 중요한 날이었다. 6월에 있을 ‘창의융합 경진대회’ 사전 점검. 이 악마 대학교의 존재이유라고 봐도 무방할, ‘어떻게 인간을 불행하게 만들 것인가?’를 발표하는 날이 불과 며칠 뒤였다. -8쪽
‘어떻게 how’의 문제는 항상 예측 가능한 범주를 벗어나는 머리 무게의 증가와 더불어 간헐적으로 머릿속을 쿡쿡 쑤시는 듯한 통증을 동반합니다. 아주 질이 나쁩니다.
‘어떻게 how’의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하느냐는 다분히 자기 지시적인 구조의 과제라서 만화적인 회오리를 머리 주변에 둥둥 띄우기에 딱 맞아떨어지죠. 그럼 우리 뒤의 어떻게,를 다르게 바꿔 보면 어떨까요. 무슨 방법을 통해서, 왜 그렇게 만들어야 하는가. 어떤 질문들은 조건을 약간 (편법적으로) 변형하는 것만으로도 제법 쉽게 풀리곤 합니다.
당신이 제안한 아이디어는 ‘영생’이라는 테마에 기초를 두고 있더군요. 영생 좋지요(전 안 좋아요).
인류에게는 태곳적부터 영생이라는 이슈에 천착해 온 아주 많은 조상이 있기도 합니다. 현대인의 눈으로 보면 대체 왜 저랬을까 싶은 기기묘묘한 어떻게 할 것인가, 영생 – 이런 제목을 붙여서 포트폴리오화할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 정도거든요.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지도교수는 무슨 개인적인 억하심정이 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당신의 아이디어와 발표를 무참하게 짓밟습니다. 가히 악마적으로요.
여기, 수도 없이 많은 PT의 경험이 있는 일개 하찮은 인간 무명씨가 당신이 당한 모욕에 진심으로 분개하고 있음을 알려 드리고 지나가도록 하죠. 예, 아무튼. 그리하여 당신은 몹시 의기소침해졌습니다.
친구들은 당신을 돕고 싶은, 진실로 악마답지 못한 마음에서 (아니 잠시만요. 이제 보니 자신들의 우수 과제를 자랑해서 당신을 더더욱 기죽이려 한 악마다운 발상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뒤늦은 깨달음이 옵니다) 실로 모범이 되었던 자신들의 과제를 시뮬레이션해서 보여 주죠. 그 두 테마는 각각 사랑과 도박이었습니다. 악마와의 계약을 통해 고전적인 파멸에 이르고야 마는, 누구나 다 아는 파멸 상승 곡선 그래프를 가진(제가 만든 말입니다) 케이스 스터디죠. 달리 말하자면 이건 일회용입니다. 지금까지 악마의 계약이란 이렇게 일회성으로만 이루어져 왔습니다. 즉, 관성에 잔뜩 젖어 곰팡이가 피기 일보직전이었던 겁니다, 당신네 악마계는요! 그러니 당신의 아이디어는 ‘난도가 높다’느니 ‘마력이 많이 들어서 효율이 나쁘다’느니 하는 폄하를 당할 수밖에요. 아, 안타깝습니다. 하여간 고인물이 문제예요. 어디나 문제야.
그러나 대반전. 이게 웬일입니까. 이름을 다 적기도 귀찮은 바로 그 경진대회를 참관하러 왔던 대악마는 당신을 알아보지 못한 지도교수에게 버럭 화를 냅니다.
“이런 멍청한! 이놈의 대학은 내가 후원한 마력은 다 어디다 쓰고 이런 놈을 교수랍시고 앉혀놓았어!” -106쪽
아니 뭐죠 이거. 왜 이렇게 기시감이 드냐고요. 너무 낯익어서 슬플 정도입니다.
대악마가 화를 내는 것도 당연하죠. 다른 악마들이 낸 아이디어가 일회성이라면 당신이 낸 아이디어는 한 사람을 무한동력원으로 만드는 건데요. 이게 비교가 될 일인가요. 그걸 알아보지 못한 지도교수에게 남은 운명이 무엇일지 기대가 될 정도입니다. 이런 건 어떨까요. 악마계에서 쫓아내서 인간으로 환생하게 하는 겁니다. 그거 재미있을 것 같지 않은가요.
정말 재밌었어요, 벨. 딱히 줏대가 있어서 그렇게 밀고 나간 것 같지는 않지만, 어쨌든 열등생에서 한순간에 우등생 of 우등생이 된 기분이 어떤지 궁금하네요.
다만 인간이라면 누구나 당신의 수법에 걸릴 것 같아서 그게 좀 걱정이에요. 부탁인데 나한테는 찾아오지 말아 줄래요? 안 걸려들 자신이 없어서.
그럼, 건투를 빌… 어야 하나? 아, 이런 고민을 안겨주다니… 진짜 악마 같네요, 벨…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61957975
놀랍게도 벌써 두 번째 [책속의 그대들, 오늘도 안녕한가요] 브런치북을 30회 꽉꽉 채워 끝냈습니다. 시간이 정말 빠르다는... 새삼스러운 얘기를 굳이 해야 하나 싶긴 한데 할 거고요, ㅎㅎ 중간중간 일정이 너무 꼬이거나 연휴가 끼이면 말없이 휴재를 한 적이 있던 것이 조금 아쉽습니다.
핑계 없는 무덤이 없습니다만 개인 사정으로 항상 답방을 다니지 못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연재물을 꼭꼭 찾아와 라이킷을 눌러주시는 고정독자님들의 닉네임은 항상 기억합니다.
찾아와주심에, 그리고 '보고 간다'는 흔적을 남겨 주심에 늘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진심이에요). 일이 많아서 몇 주 안에 세 번째 [책속그대 3]를 시작하기는 쉽지 않겠지만, 이야기하고 싶은 책들은 늘 넘쳐나고 흥미진진한 '납작한 친구들'은 너무나 많이 기다리고 있기에 어깨와 눈이 버텨주는 한 이 이야기는 계속될 듯합니다. 그러니, 또 뵙겠습니다.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