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혜윤, 책을 덮고 삶을 열다
읽는다는 행위가 읽는 사람에게 남겨주는 것은 무엇일까. 혹은 어떤 방식으로 독자를 통과할까. 한 권의 책은 정말로 그 책을 읽은 사람을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드는 게 맞을까.
가장 마지막 질문의 답은 명백히 아니오일 것이다.
어떤 책은 그 책의 독자를 더욱 편협한 외골수로 만드는 데 종종 기여한다. 하지만 보통의 경우, 책을 찾아 읽는 사람이 단 한 권의 책만 읽고 그만두는 경우란 좀처럼 없는 데다 독서는 다른 분야에 비해 최적화된 알고리즘이 개입하기 쉽지 않기 때문에 – 하기는 하더라 – 그나마 좀 낫지 않은가 싶다.
달리 말해 나라는 존재를 조금 더 확장할 수 있는 문은 이제는 책밖에 남지 않은 듯도 싶고. 낯선 세계로의 초대를 받을 수 있는 곳, 내가 속한 세계의 가치관으로는 이해하기 쉽지 않았던 낯선 타인의 맥락을 온전히 체험할 수 있는 장소가 이렇게 사라져 가는 게 사회적으로 결코 유익한 일이 아니지 않나.
이해할 수 없는 존재가 주는 낯선 불편함을 감당하고 수용해 보려 애쓰는 것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의 마땅한 도리일 텐데 이젠 아예 내가 보기 싫은 사람과 의견은 ‘차단’하고 살 수 있는 세상이 되어가니 진짜 문제는 문제다. 더 문제는 이게 왜 문제인지를 모른다는 건데 하… 내가 무슨 사회학자도 아니고 머리 싸매고 그냥 고개만 흔들흔들…
알고리즘이 반듯하게 정리해 준 세계는 얼마나 깔끔하고 편한지. 솔직히 나만 해도 그 세상이 편하다. 헛소리 지껄이는 사람은 간단하게 차단하고 블락하면 좋다. 이 얼마나 간편한가.
그러나 내 눈에 보이지 않게 됐다고 해서 그의 존재가 현실에서 사라지는 게 아닌데. 나 역시 그렇게 간단한 해결(?) 법을 애용하면서도 종종 그런 생각을 한다. 이건 꼭 1988년에 거리를 깨끗하게 해야 한다고 싹 밀어버린… 그 어떤 행태와도 몹시 유사하다고. 아 몰라. 아무튼 이 책 하나를 두고 별의별 이야기를 다 떠올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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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혜윤 PD의 책은 다 읽었는데, 그의 글을 읽을 때마다 항상 하는 생각이 있다.
세상의 소외된 이야기를 정성껏 손질해서 내놓은 한 편 한 편의 글이 마치 미식가를 위해 공들여 요리한 한 접시 같다고. 불시에 큰 고통에 잠식당한 사람은 그 감정을 남들이 받아들이기 쉽게 정돈해서 전달할 여유가 없다. 울부짖는 것 말고 달리 뭘 할 수 있겠는가.
이 시대의 사람들은 날것의 고통과 감정을 수용하고 공감해 줄 만한 여유가 없기에 종종 그들의 고통을 외면한다. 딱히 사람들이 못되고 인정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만한 품을 내기에 모두의 삶이 여러 방면으로 신산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걸 정말 잘하는 사람이 정혜윤 PD다. 진심으로, 정혜윤 PD가 불시에 찾아온 비극으로 삶이 망가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단정하게 모아 전달해 온 공로가 정말로 작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런 일은 아무나 못 한다. 누군가의 슬픔에 진심으로 공감하고 상실을 위로하려 하는 글에, 내가 그런 아픔을 겪지 않았어도 사람은 누구나 위로받는다.
이 책 역시도 그가 읽었던 수많은 책들의 페이지 위로 현실의 이야기가 한 조각씩 잇닿아 수놓인다. 이음매조차 보이지 않고 어디서도 매듭을 찾아볼 수 없게 자연스레 포개진 문장은 촘촘해서 한 번 읽기 시작하면 벗어나기 쉽지 않다. 감정을 추슬러야 하는 대목이 불쑥 등장하곤 한다. 그럴 때마다 얼른 틈틈이 생겨나는 여백 사이에서 호흡을 고른다. 그렇게 읽어야 하는 책이다. 읽고도 내가 언제 읽었는지도 잊고 있었던 책들이 삶의 어떤 순간에 갑작스레 위로처럼 찾아올 때가 있겠구나, 그런 깨달음을 얻었다.
나는 언제부터인가 나를 ‘책과 자연을 사랑하는 라디오 피디’로 생각하고 그렇게 말하고 있다. 몇 년 전에 처음 나를 말하는 이 방법을 생각해 내고는 정말 기뻤다. (…) 그 직전까지 어떤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던지와 상관없이 사랑과 기쁨이, 많은 빛나는 문장과 기억들이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올라온다. 내가 사랑하는 것에 걸맞은 사람으로 말하고 싶어진다. -137쪽
밑줄, 접어놓은 페이지, 옮겨 적은 글귀들은 우리의 정신 상태를 알게 한다. 밑줄 친 문장들은 각자의 마음이 필요로 했던 바로 그 말들이다. 모든 페이지마다 감탄하고 사랑을 느끼고 뭔가를 놓치지 않으려 하는 것은 독자 자신의 마음이다. 책의 아름다움은 책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독자로부터도 나온다. -17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