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승주, 미끄러지는 말들
맞아, 말은 물고기 같은 데가 있어서.
어이없이 읽히는 대꾸로 읽힐지도 모르지만 책의 제목을 본 순간 입속에 저절로 떠올랐던 말이었다. 상대에게 가 닿길 원했던 말의 태반은 어떻게 건져 올린 건지 나조차도 모르겠는 펄떡거리는 물고기 같아서 종종 놓치기가 일쑤였다. 조금 전까지 여기 있었던 말이 사라진 빈자리는 곧 어버버거리는 말 더듬 소리나 데굴데굴 구르는 눈동자로 채워지곤 했다.
아니 그러니까, 분명히 있었다고. 여기 있었다니까, 내가 하려던 말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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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덮고 난 뒤에 내가 생각한 제목의 미끄러지는 말들과, 저자가 염두에 두었을 미끄러지는 말들이 같지 않음을 알았다.
아무려면 어떤가. 그 또한 아무리 철두철미하게 계산된 말이라 하더라도 그 안에는 여전히 오독과 오해의 빈틈이 많음을 증명하는 사례인데. 그리고 나는 잘못 전달되었어도 기묘하게 이어지는 대화가 자아내는 어이없는 웃음을 좋아하는 사람이어서 종종 즐겁게 그 현장을 지켜보곤 한다. 그러니까 이 입에서 저 귀로 던져진 문장 한 토막이 in 하지 못하고 완전히 고꾸라지거나, 혹은 아슬아슬하게 슬라이딩하는 모습들을.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 책은 내가 지금까지 억지로 웃기려고 써본 말들과는 조금 다른, 진지하고 슬프고 반성하게 만드는 내용을 다룬다. 여러 번 쓴 적이 있지만 또 쓰자면, 나는 언어를 소재로 다루는 글을 좋아한다.
인간은 상황과 사리에 맞는 말보다 그렇지 못한 말을 오백만 배 정도 더 하는 존재이고 자신의 언어 체계 밖에 있는 것을 거부하는, 고집스러운 폐쇄성의 결정체이기까지 하다. 즉 인간의 언어를 소재로 삼는 글은 결국 어떤 차원에서는 인간의 부조리함… 아니 이건 너무 멋있는 말이고, 그냥 솔직하게 쓰자면 인간의 지지리 못남을 적나라하게 까발린다는 측면에서 아주 재미있을 수밖에 없다. 자조가 지나쳐 가끔은 자괴감이 들긴 하지만, 뭐.
국어라는 체제의 토대, ‘한국어=한국 영토=한국 국민’이라는 도식은 이런 현실을 문제나 오염으로 규정하고 애써 외면하거나 은폐한다. 이 삼각형 도식은 마의 버뮤다 삼각지대만큼이나 무시무시해서 우리가 복수의 언어적 정체성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 자체를 망각하게 한다. ‘다문화’에 대한 담론은 홍수를 이루지만 ‘다중 언어’에 대한 논의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다. -29쪽
이건, 정말로 적어도 자신이 사회의 구성원이라는 자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진지하게 한 번쯤 고민해봤으면 하는 문제다.
언어적 정체성은 n개 국어를 구사할 수 있는 사람만이 갖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각자가 소속된 작은 사회를 옮겨 다니며 그에 어울리는 언어를 구사한다. 가정에서의 나와, 직업인으로서의 나와, 나이 든 부모께 안부 전화를 거는 나의 정체성은 같다고 할 수 없다. 만약 그것이 단순한 사회적 소속의 구분이 아니라 나의 사상과 정신적 소속감에 크나큰 영향을 미치는 집단의 구성원으로서의 정체성이라고 한다면, 그 언어를 어떻게 구사해야 할지, 그 언어가 비구성원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에 대해서는 보다 더 섬세한 고민이 필요하다. 왜? 당신의 언어적 정체성 역시 그 집단의 정체성에 한몫을 할 테니까.
기실 인용문에서 이어지는 내용은 지금 내가 한 말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다.
완전히 오독했네,라고 말해도 될 정도다. 하지만 꿋꿋이 이 얘길 써버린 이유는, 저 문장을 읽자마자 내 머릿속을 뛰어다닌 이슈는 저자가 언급한 문제가 아니었던 까닭이다. 실제로 사람들은 여러 언어적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가는데 우리는 그 사실을 왕왕 잊는다는 것이었지…
저자의 논지가 확실히 보이는 문단을 읽으면서도 이렇게 엉뚱한 소리를 지껄이는 독자가 있는 판국에(다른 말하고 있다는 자각이 있긴 하지만, 어쨌거나 잠시 반성타임), 내가 하는 말이 상대방에게 항상 100% 올바르게 전달될 거라는 확신을 갖는 사람들의 자신감은 어디서 오는 것인지 가끔 궁금하다.
이해 못 하는 네가 문제고 나는 문제가 없다는 단호함은 가끔 무섭기까지 하다. 정답은 여기에 가깝지 않을까. 너의 문해력, 나의 표현력이 다 문제다,라고. 우리 모두가 문제투성이야…
표준어 제정 과정에는 우생학과 위생학이 개입한다. 우생학적 처리 과정은 서울말을 우등한 것으로, 지역어를 열등한 것으로 만들어 표준어에서 지역어를 제외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다음은 위생학적 처리 과정. 이 처리 과정을 통해 토착어가 아닌 외래어들은 ‘오염된 말’이 된다. -34쪽
나는 내가 표준어 구사자에 가깝다고 생각하지만, 뭣도 모르던 시절에도 표준어의 정의가 구역질 난다고 생각했더랬다(지금은 바뀌었는지 모르겠는데). 교양? 교양이 사투리 없는 말을 구사하는지 아닌지로 측정 가능하면, 억양 센 지방말을 쓰면 모조리 교양 부족이란 말인가. 대체 이토록 교양 없는 정의가 있을 수가 있나.
아, 그래서 오래전에 반기문의 영어가 촌스럽네 어쩌네 하는 교양 없는 말을 하는 사람이 있을 수가 있었구나. 아, 천박하다. 이루 말할 수 없이 천박해.
그렇다면 미국식 영어야말로 교양 없음의 최고봉 아닌가. 감히 해가 지지 않는 제국에서 제멋대로 이탈한 자들이 세운 나라에서 근본 없는 억양과 발음으로 교양미 넘치는 영어를 오염시킨 게 몇 년째에 이르고 있느냔 말이지. 게다가 심지어 온갖 나라의 억양이 뒤섞인 건 말해 뭐 하나. 그런데… 누가 미국식 영어의 교양 없음을 논하던가.
... 진정하고,
읽기 과정을 연구한 케네스 굿맨은 좋은 읽기란 ‘올바른 기대’를 가지고 그 기대를 검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읽기란 단순히 글씨를 해독하는 과정이 아니다. 독자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세상에 대한 지식과 기대라는 틀로 새로운 정보를 이해한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어떤 것을 읽기 전에 ‘요상한 것’을 기대하면 ‘요상한’ 것을 읽게 된다는 말이다. -97쪽
이 정도 인용에 이르면 이 책이 대략 어떤 관점으로 언어를 바라보고 있는지를 읽을 수 있을 테다.
애초에 책 표지에 ‘사회언어학자가 펼쳐 보이는 낯선 한국어의 세계’라는 부제가 붙어 있기도 하지만, 언어는 사회를 읽어내는 강력한 수단 중 하나임은 분명하다.
하나 장담할 수 있는 것은 정말 맞는 말인데…라고 고개를 주억거리며 읽기 시작한 독자는 아마 대부분의 글에서 그렇게 수긍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고, 응 아니야 모드로 읽기 시작한 독자는 끝까지… 읽을 리가 없다. 아마 40쪽 정도를 넘기기 전에 책을 덮게 될 테니까.
언어는 문명의 세계에서 누구보다 너를 강하게(혹은 약하게) 만들어 줄 궁극의 비기이고 그 무기를 적재적소에서 휘두를 스킬을 연마하거나 말거나 그건 너의 선택이다,라는 말을 한때 글쓰기를 가르쳤던 어린 남학생들에게 해준 적이 있었다.
그때 반짝이던 소년들의 눈빛이 여전히 선연하다. 적어도 그 애들이, 언어를 타인을 배척하는 도구로 쓰고 있지는 않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