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딘가에서 들려오는 그 소리를

김하나, 금빛 종소리

by 담화

서평이냐 리뷰냐를 세세하게 따지지 않고, 일단 독서 에세이라고 크게 가름한 분류 아래의 책들이 달고 있는 제목을 주르륵 읽어 본다. 대체로 제목 어딘가에서 이것은 책을 좋아하는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혹은 이런 책들을 읽어 왔습니다, 또는 같이 읽지 않으시겠어요, 하고 은근히 권하는 듯한 류의 인상이 전해져 온다.

그렇게 분류 페이지를 훑어 내려가다 보면, 이건 무슨 뜻으로 붙인 제목일까 멈춰서 생각하게 하는 제목들이 드물게 발견된다(비유적인 제목이 갈수록 줄고 있는 건 어쩔 수 없는 흐름인 듯하지만, 그건 그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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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하나는 언어전달력이 유달리 좋은 사람인데(매우 부러움), 팟캐스트를 들을 때마다 매번 감탄하게 되는 깔끔한 말솜씨는 글에서도 여전하다. 빽빽한 문단 속에서도 눈이 쉴 곳, 그냥 내달려야 할 곳이 자연스럽게 찾아지는데 그 또한 오랜 세월 단련한 말과 글의 숙련됨에서 자연스레 배어 나오는 세련됨일 것이다.


아무튼, 그래서 이 서평집 「금빛 종소리」로 말할 것 같으면, 도대체 저 제목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를 먼저 궁금해하지 않을 수가 없다. 소설이라면 마지막 장에 이르기까지 가르쳐 주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다행히 우리는 서문에서 이 제목의 유래를 금세 찾아볼 수 있다. 누구나가 들어봤을 테지만 완독한 사람은 백분의 일도 되지 않을 바로 그 책,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등장하는 한 대목에서 따 온 제목인데 김하나 작가는 제목을 이렇게 붙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나는 이것이 고전을 읽을 때 느끼는 감각과 비슷하다고 여긴다. 고전은 시간의 검증을 거친 것이므로 독자의 시대로부터 훨씬 이전에 쓰인 작품이다. 작품이 쓰인 시대와 독자 사이에 놓인 긴 세월을 그토록 오래 지나왔는데도 공기에 섞이지 않고 수평으로 들려오는 금속성 종소리처럼 연속적인 울림을 내는 것이다.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다고 생각하는 현시대의 우리 발아래 핀 꽃들을 스칠 듯 지나가며 파르르 떨면서. 작가가 옛 시대에 글을 쓰고 발표할 때는 그의 글이 울리는 종소리가 동시대 너머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도 계속해서 또렷한 파장을 일으킬 줄 알았을까? -13쪽


나는 이 단락이 매우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과거의 작가와 현대의 독자 사이에는 가늠하기 어려운 거리가 존재한다. 시간뿐만이 아니라 공간이 주는 거리감도 무시할 수 없다. 은은하게 울리고 있지만 듣고자 노력하지 않으면 들을 수 없는 종소리. 그 소리는 헤아릴 수 없는 거리감을 순식간에 단축할 수 있는 소리지만 ‘울리는’ 소리라 결코 거슬리지도, 엄청난 존재감을 뿜어내지도 않는다. 한 번 듣기 시작하면, 언제든 들을 수 있을 소리.


나는 문학을 즐길 때도 ‘디스프루타르’ 동사를 떠올리며 과일의 즐거움을 향유하듯이 생각하고는 한다. 많은 사람들은 문학이란 글을 읽어서 이야기의 전개를 따라가고 내용을 이해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것도 맞다. 하지만 오감을 동원해서 글을 읽을 때, 우리는 그저 글을 읽기만 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우리는 문장을 속으로 소리 내어 읽으며 단어들이 내는 저마다의 음색과 그것이 어우러져 만들어 내는 독특한 리듬을 느낀다. 다시 말해 우리는 문학을 듣는다. 그리고 문체의 질감을 더듬는다. 어떤 문체는 제련된 강철이고,…… -47쪽


글이든, 음악이든, 그림이든, 많이 읽고 듣고 볼수록 우리는 그것을 더 풍부하게 즐길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하게 된다. 일차원적인 감각과 인지에 머무르던 경험을 복합적으로 다차원적인 경험으로 통합할 수 있게 되며 여기에 정신이 개입하여 세계를 바라보고 해석하는 나 자신의 내면에 미학이라는 이름을 단 방을 만들게 된다. 현실의 부동산에 관심을 갖는 일도 참 중요하긴 한데, 부디 내면의 집안과 부지 관리에도 신경을 쓰는 사람들이 더 많아졌으면 하는 사심을 조금 담아서 말해보았다.


지난주에 예술의 전당에서 열리고 있는 《오랑주리 - 오르세 미술관 특별전 : 세잔, 르누아르》 전시회를 다녀왔는데, 이미 오래전에 죽고 없는 예술가들이 남긴 작품을 볼 때마다 느껴지는 감각의 파동이랄까, 그런 것이 있다.


그것을 작품이 두르고 있는 아우라라고도, 혹은 예술적 자장이라고도 불러도 좋겠다.

캔버스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형태를 만들고 색을 입히던 화가는 이미 떠나고 없지만 그가 쌓아 올린 예술적 고뇌와 세계관이 여전히 남아 그가 한 작품 한 작품마다 담아놓은 그 무엇을 바라보는 관람객의 마음에 커다란 울림으로 전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형태는 다르지만, 오랜 세월을 견딘 글 역시도 그러한 속성을 띠고 있다는 것 역시 분명한 진실이다. 그러니까 그 종소리를 기꺼이 듣고자 하는 마음을 내기만 한다면, 조금의 시간을 기꺼이 들일 수고를 낸다면 종종 고막을 긁곤 하는 현대의 거친 소음 대신 가슴 밑바닥에 고인 이름 모를 웅덩이의 표면까지 잔잔하게 흔들 수 있는 종소리를 들을 수 있을 거라고 말하는 이 책을 펼쳐 보면 참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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