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인 앨리슨, 구불구불 빙빙 팡 터지며 전진하는 서사
어떤 형식이건 소설이라는 꼴을 갖춘 글을 써본, 혹은 써보고 싶어서 기초를 공부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들어보았을 개념이 있다. 캐릭터 아크를 포함하여 소위 기승전결로 요약할 수 있는 서사의 아크 arc(호)가 바로 그것인데,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기승전결이라는 말에서 약간 오른쪽으로 볼록하게 솟은 형태를 그릴 수 있을 터이다.
사뭇 교조적이지 않은가 싶기까지 한, 하지만 누구도 지금껏 반박하지 못한 서사의 알파이자 오메가 같은 이론이라고 하겠다. 나도 그렇게 믿었다. 그러니 기승전결을 갖추지 못한 소설은 마땅히 소설의 기본조차 갖추지 못한 돼먹지 못한, 근본 없는(?) 이야기라 불러야 마땅할 텐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어떤 소설들에는 도무지 기승전결이라고 부를 만한 구조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그런 소설을 극찬하는 평론가의 글을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다. 이쯤 되면 나 같은 변방의 독자 일인은 동공이 진동하는 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기승전결이 있어야 한다는 거야, 없어도 된다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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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 경고하건대, 이 책에서 독자는 퍽 당혹스러운(??) 하지만 언뜻 고개를 주억거리게 되는 저자의 선언을 만나게 된다.
인용할까 했는데 그건 책을 읽는 독자의 충격으로 남겨주는 것이 도리일 것 같아서 슬쩍 덮어두기로 한다. 아무튼 요지는, 모든 서사에 충분한 빌드업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하나의 순간에 매달려 아래로 계속 아래로 파고들어 가는 서사도 있을 수 있으며, 동일한 종류의 사건을 반복하여 서술하는 종류의 서사도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 사람(인물)의 생을 뒤흔드는,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사건이 반드시 그런 사건이 발생하기 위한 전제조건(기)과 인물들의 관계가 불러일으키는 긴장감(승), 점차 짙어지는 갈등과 어딘가에서 튀는 불꽃(전), 이윽고 그 불씨가 살라먹은 모든 관계와 배경과 기타 등등의 잔해가 전하는 여운(결)으로 풀리는 이야기만이 이야기라 불릴 수 있는 게 아님은, 사실 모두가 알고 있지 않나.
그러나 많은 소설가들이 여전히 아크 형태의 서사를 쓰고 있고, 그것이 대중적으로 친숙한 형식이고 진입장벽이 낮은 형식이기에 앞으로도 소설이든 영화든 대중적인 서사 형식은 계속 아크를 띠고 만들어질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험적인(이 말은 곧 대중적이지 않다는 의미이기도 하니) 형식의 이야기는 계속 탄생할 것이고 그중 어떤 것은 동류의 경험을 가진 독자들에게 강렬한 인상과 공감을 불러일으키게 되겠지. 그렇게, 비주류가 주류에 천천히 편입되어 기존의 장르가 경계를 확장하는 것은 언제 보아도 전율이 일 정도로 짜릿하다.
생태계든 인간의 정신을 온통 지배하는 문화 컨텐츠계든, 하나의 계가 동질화되는 것은 멸종의 선행 시그널에 다름 아니다. 그러므로 낯선 형식의 예술을, 컨텐츠를 소개하는 이런 책들을 꾸준히 출간하는 출판사에겐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은 스스로 이성적이라 여기는 만큼 편협한 구석이 있어서, 낯선 개념을 받아들이는 데 원래 심리적 저항감이 심하다.
그러나 이미 그런 실험을 문학적으로 지속해 온 대단한 작가들이 있었기에 그것을 이론화할 수 있는 후대가 존재할 수 있었던 게 아니겠나. 그러니 궁금하면 이 책을 펼쳐 보아도 좋겠다. 기승전결이 아닌 어떤 형식의 이야기가 세상에 존재해 왔고, 누가 또 어떤 실험을 하고 있는지를 기술한 한 권의 서사 연구 보고서가 여기에 있다.
그 책에 담긴 네 편의 이야기를 각각 읽는 것은 어두운 강물 위를 꿈결처럼 거슬러 떠가는 것과 비슷한 경험이었다. 하지만 내가 가장 몰두하게 된 건, 그 각각의 부분이 모여 어떻게 더 커다란 무늬를 만들어내는지 알아내려 애쓰는 과정이었다. -2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