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곤경을 외면하지 못하는

A.J. 피어스, 친애하는 미시즈 버드에게

by 담화

안녕하세요, 친애하는 미시즈 버드… 가 아니라 미스 에멀라인 레이크.


당신은 제게 나름 익숙한 1940년대 그 시기의 영국에서 전쟁을 견뎌낸 분이시더군요. 저는 그때는 태어나지도 않았었는데, 당시를 배경으로 삼은 많은 소설과 영화를 통해, 그리고 역사서를 통해서 그때를 그래도 제법 그럴싸하게 회상하는 흉내를 낼 수 있게 된 사람 중 하나입니다.

전쟁은 길고 고통스럽게 이어지는 현재진행형의 비극이지만, 슬픔 속에서도 웃을 수 있듯 고통의 한복판에서도 어쨌든 삶을 이어갈 수밖에 없는 우리는 그곳에서도 희로애락의 찰나를 번갈아 겪곤 하니까요. 당사자에게는 특별한 흔적을 남기는 이벤트라지만 배신도, 이별도, 만남과 사랑은 상황을 가리지 않고 일어나는 일상다반사니까요. 에미, 바로 당신이 겪었던 것처럼요.

종군기자가 되고 싶어 했잖아요. 그래서 언론사에 입사하게 되었다는 사실에 당신이 얼마나 기쁨에 넘쳤을지 능히 상상이 갑니다. 그런데 잡지사라니요. 그 언론사에 채용된 게 아니었다니요.


꿈에 한걸음 가까이 다가갔다고 생각하고 실컷 설레었는데 알고 보니 그것이 내가 생각한 이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의 기분도 충분히 견디기 어려울 것 같은데, 가까스로 그걸 이겨낸 당신에게 인생은 보란 듯이 연달아 폭탄을 던지더군요. 누구에게도 말 못 할 고민을 상의해 오는 진심 어린 편지를 싹 무시하며 굳이 답할 필요가 있을까 싶은 편지에만 답변하는 고민 상담가 상사라니. 그래, 이번엔 이걸 한번 겪어봐. 잘 견뎌낼 수 있다면, 너도 그만큼 인간적으로 성숙해지겠지. 못 견디면? 뭐 할 수 없는 거고. 이야기 속의 주인공과 항상 거리를 둘 수 있는 위치에 있다고 해서 세상 모든 독자가 항상 제3자적으로 덤덤하게 주인공의 고난을 지켜볼 수 있는 건 아니거든요.

저 같아도, 가고 싶었던 언론사 대신 잡지사 에디터의 비서로 취직하는 것까지는 당신처럼 그래, 나쁘지 않아. 아주 연결고리가 없는 것도 아니고, 하고 버틸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렇지만 그 힘겨운 전시상황 속에서도 치열하게 삶을 이어가고 있는 사람들이 진심을 다해 보낸 고민 상담 편지를 ‘바람직한/바람직하지 못한’ 고민으로 분류하는 것도 모자라 쓰레기 취급을 하는 상급자 밑에서 견디는 건 정말이지 힘든 일이었을 거라 생각해요.


나는 수많은 문제의 해결책을 알지 못했지만, 아무것도 없는 것보다 상냥한 말 한마디라도 있는 것이 더 낫다는 사실은 알았다. 그 편지들을 그냥 버리기가 너무 싫었다. -79쪽


이렇게 생각하는 것도 당연하죠. 내가 고민에 빠져있을 때, 누군가의 가벼운 한마디가 마치 내가 가고 싶어 하는, 하지만 미처 용기를 내지 못하고 있는 방향으로 가라고 등을 밀어주는 한마디처럼 느껴지는 건 너무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미스터 콜린스가,


“에멀라인, 헨리에타에 대한 걱정은 접어둬요. 할 수 있는 한, 할 수 있는 일을 해요. 장담하는데 훗날 그 노력이 결실을 맺을 날이 올 거예요.
(…)
설교는 끝났어요. 미스 레이크, 당신이 잘하는 일을 찾아요. 그리고 더 잘하도록 노력해요. 그게 열쇠니까.” -85쪽


비밀 하나 알려줄까요, 에미? 사실 미스터 콜린스의 저 말에 위안을 얻은 건 당신만이 아니었어요.

당신의 모험을 읽어나갈 당시 내가 겪고 있었던 어떤 고민에 대한 답을 얻은 것 같은 기분을 느꼈었답니다. 심지어 그런 생각까지 했어요. 무엇이 결실이고, 무엇이 결실이 아닌지는 과연 누가 판별하는 것일까. 결실이 없다면 의미가 없는 것일까. 그건 아니지 않은가. 누구도 대답하지 못할 질문이며, 누구라도 자신만의 대답을 간직할 수 있는 질문이죠. 스스로의 철학을 만들어갈 수 있는 질문을 발견할 때 그 이야기는 내게 세상에서 다시없는 소중한 이야기가 되어요. 그 누구의 평가에도 상관없이 말이죠.


<여성의 벗>에서 독자들의 고민 상담 코너에 보내온 편지에 실로 따분한 모범적인 답변만을 해 주어, 실제로 진짜 조언을 기다리는 절박한 여자들이 처한 마음의 위기를 못 본 척할 수 없었던 당신은 미시즈 버드를 가장하여 그들에게 답변을 보내기 시작하죠.


하지만 상황이 힘들어지거나 악화된 지금은 어떤가. 언론은 미시즈 버드에게 편지를 보내는 독자 같은 여자들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다. 전쟁으로 자신이 알던 세상이 완전히 박살 난 여자들, 남편을 그리워하는 여자들, 외로움을 이기지 못하고 나쁜 남자와 사랑에 빠진 여자들. 아니면 그저 어리고 순진했기에 힘든 시기에 한눈을 판 여자들. 사람들이 언제나 겪어온 문제들이지만 모든 것이 뒤죽박죽인 지금만은 그저 그들에게 온몸으로 감내하라고 한다. 이들은 누가 지지해주어야 하나? -100쪽


그러게요, 에미. 코너에 몰린 사람들은 누가 지지해 줄까요? 약자를 돕고 싶다는 순진한 마음으로 약간의 부정을 저지른 사람은 어떤가요. 그가 곧 처하게 될 곤란은 누가 도울 수 있을까요? 우리는 늘 매일같이 어떤 종류의 난처함에 빠진 사람들을 목도하며 안타까워하는 동시에 스스로 헤어 나올 수 없는 곤경에 빠져 허우적거리곤 하지 않던가요. 저는 당신이 옳았다고 생각해요. 비록 거대한 실수를 저지르고 실수가 되돌릴 수 없는 파국을 불러오는 경우도 없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성적인 냉담보다는 선을 넘은 다정이 차라리 낫지 않은가, 하고요. 이 또한 저의 단견일 수 있겠지요. 하지만 당신은 저와 같이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확신을 얻을 수 있어서 반가웠어요.


이 독자가―그리고 미시즈 버드에게 편지를 쓴 다른 독자들이, 그렇게 따지면 사실 우리 중 누구라도―두려움을 느낀다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나는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다정한 버팀목이지, 등을 꼿꼿이 펴라는 설교가 아니라고 절대적으로 확신했다. -364쪽


어떤 다정함이 지나쳐 오지랖이 되고, 그게 오해가 되고 슬픔이 되는 순간이 겹치더라도 역시 마음이 넘치는 쪽이 세상을 좋게 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확신이 드네요. 지금의 세상은 많이 버석해요. 조금 더 인간미가 넘쳐흐르려면 역시 당신 같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널리 읽히는 쪽이 좋다는 생각을 해요. 누구에게도 걱정거리를 털어놓을 수 없어 힘겨워하는 사람을 외면하지 못하는 에멀라인 레이크 말이에요. 만나서 반가웠어요, 에미. 오늘 밤은 부디 독일군의 공습이 없기를 바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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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의 그대들, 오늘도 안녕한가요]의 세 번째 연재를 열었습니다. 이번에는 30주 동안 또 어떤 소설 속 등장인물들과 이야기를 나눌지 저도 전혀 모르겠지만 :) 즐겁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이어나가보려 합니다. 종종 놀러와주시는 분들, 처음 뵙는 분들 모두 기쁘게 환영합니다. 늘 그렇듯, 끼적이는 것을 좋아하는 담화 드림.

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