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리, 나나 올리브에게
있잖아요, 나나 올리브.
한 사람의 이름이 어떤 감정의 동의어가 된다는 것은 진짜 근사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상냥함, 다정함, 든든함. 누구나 마다하지 않을 마음이고 누구나 필요로 하는 것이지만 어디에서도 쉽게 얻을 수 없는 것이기도 하죠. 특히 그 마음들이 간절하게 필요하지만 가장 찾아보기 어려운 곳이 전쟁으로 쑥대밭이 된 사람들의 마음밭이 아닐까 생각해요. 바로 그런 곳에서, 누구든 입을 모아 나나 올리브를 찾아가면 다 괜찮아질 거라고 말한다는 것은 얼마나 굉장한 일일까요. 얼마나, 대단하고 숭고한 일일까요.
그거 아세요, 나나 올리브?
자랑 같지만 저는 대단히 기억력이 좋은 편이에요. 여기서 기억력이 좋다는 건 기억력 챔피언쉽에 출전할 만한 기억력 테크닉이 좋다는 의미가 아니에요. 저는 어려서부터 사소한 것을 잘 기억했어요. 다른 건 잘하는 게 없었는데, 별것 아닌 작은 일들을 잘 기억해 주는 능력치 덕분에 저는 의외로 잔인하고 가차 없는 어린애들의 세상에서도 제가 있을 자리를 잘 만들고 버텼더랬죠. 그치만 그건 지금 중요한 얘기가 아니에요. 그러니까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때까지만 해도 저는 진짜 나나 올리브가 이 사람이었구나, 황폐해진 세계에서 나나 올리브는 사람들에게 이런 존재였구나,라는 걸 가득 끌어안은 여운과 함께 마음속 어딘가에 깊이 갈무리해 넣어두었단 뜻이에요. 그게 불과 한 달여 전의 일이었어요.
그런데 놀랍게도, 다시 나나 올리브의 이름을 적어본 이 순간, 나나 올리브라는 이름 주변으로 함께 개켜 넣었던 여러 세부사항들이 달아나고 없네요. 푹 패인 베개처럼, 나나 올리브와 함께 그곳에 곱게 앉아있었던 그 정보들이 말이죠. 그러니까 나나 올리브라는 이름과 그 이름을 둘러싼 폭신폭신한 감동은 그대로 남아 있는데 말이에요. 이 무슨 당혹스러운 일인지. 과연 진짜 나나 올리브는 누구였을까. 나나 올리브라고 불리는 이 사람은 누구였을까. 진자처럼 흔들리며 나를 이야기의 끝까지 데려간 의문만이 남아 있네요. 이렇게까지 완전히 잊어버릴 수 있다니 놀라움을 넘어 황당할 지경이에요.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하죠. 타인에게 대가 없는 관심과 사랑, 돌봄을 내어준 사람이 세상에 무엇을 남겼는지는.
오랫동안 먹어야 하는 걸 못 먹은 것은 허기진 자리를 그대로 몸피 밖으로 드러내게 마련이죠. 당신은 아마도 그걸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사람일 거예요. 그러니까 못 먹어서 빼빼 마른 몸뚱이처럼, 마땅히 받아야 하는 관심과 애정을 받지 못한 존재들에게서 느껴지는 정서적인 구김살을 알아본 사람. 모두가 제 한 몸 챙기기 바쁜 그런 메마른 상황에서 모든 것이 모자랐어도 서로의 결핍을 기꺼이 나누어지어 줄 마음을 내도록 만들어주는 사람.
나는 사자머리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집 안을 분주하게 왔다 갔다 하는 나나를 상상해요. 그래서인지 사자머리가 내 이름을 물어봤을 때, 나도 모르게 ‘나나 올리브’라고 대답했어요.
“나나라기엔 너무 젊은데요?”라고 사자머리가 말했지만, 나는 속으로만, 난 이미 늙어 버렸는걸, 하고 대답했어요.
시간은 상대적이에요. 어떤 사람들에게는 일 초가 일 분이 될 수도 있어요. 그러면 일 년은 육십 년이 되겠네요. 그러면 나는 전설 속의 용만큼 늙은 존재예요. 모든 것을 다 지켜보면서 혼자 살아남을 수밖에 없었던 아주 늙은 용이요. -81쪽
사람들은 모두 비슷한 슬픔을 안고 있어요. 그 사실이 나를 버티게 해요. 가끔은 슬픔이 턱밑까지 차올라서 그만 잠겨 버리고 말 것 같을 때, 내 옆에 나처럼 턱밑까지 차오른 슬픔 속에서 천천히 앞으로 헤엄쳐 가는 사람을 보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나도 아, 아직 괜찮구나, 하고 따라서 헤엄을 쳐요. 헤엄치는 나를 보고 또 다른 누군가 역시 헤엄을 치겠지요. -104쪽
똑같이 낙오되고, 똑같이 부족하고 똑같이 슬픈 상황에 처한 사람들끼리도 웃음을 나눌 수 있고 관심을 나눌 수 있고 서로를 도울 수 있다는 사실을 실천해 보인 나나 올리브라 해도 전쟁의 포화 속에 뒤처진 사람들 모두를 도울 수는 없었겠죠.
나나 올리브에게 도움을 받았던 사람들 전부가 나나처럼 타인과 연대하는 법을 배웠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그럼에도 나나의 이름을, 나나의 행적을 잇고자 하는 누군가가 있었고 나나를 기억하고 찾아온 사람들이 있었죠.
어떤 다정함은 그런 식으로 쭉 이어지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해요. 나나의 이야기를 읽은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도 그렇게 살고자 하는 사람이 소수지만 분명히 있을 거거든요. 좋은 사람은, 좋은 이야기는 그래서 꼭 필요해요. 점점 건조해져 가는 세상 한구석을 조금이나마 촉촉하게 해 주니까요. 고마워요, 나나. 우리 어딘가에서 꼭, 또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