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사랑했던 일에 바치는 헌사

폴 오스터, 바움가트너

by 담화

바움가트너 교수님, 당신의 이름 Baumgartner를 정확히 반 가르면 나무와 정원사라는 뜻으로 갈라진다는 사실을 누가 가르쳐 주었습니다. 나무를 기르는 사람, 정도로 이해해도 될까요.

그런데 이상하죠. 저는 이 소설의 마지막 장을 넘기며 이것은 일평생 길러온 나무의 뿌리가 흔들거리다 마침내 어떤 바람을 못 이겨 무너지는 것 같은 장면을 목격한 사람이 된 듯한 기분이었거든요. 그러고 보면 우리는 모두 어린 묘목 시절을 거쳐 아름드리나무로 퍽 오랜 시간을 지내다가 천천히 스러져 가는 나무를 닮은 것 같기도 합니다.


누구에게도 그늘을 드리워줄 수 없는 노년의 삶이란 어쩐지 좀 쓸쓸합니다.

한창때를 자랑하는 보기 좋은 기운찬 나무처럼 보기만 해도 싱그러워지는 기분을 안겨주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어린 나무처럼 열심히 자라라, 열매도 맺고, 하고 응원해주고 싶어지는 것도 아니니까요. 그 유명한 쉘 실버스타인의 「아낌없이 주는 나무」의 애틋한 결말은 볼 때마다 기분이 좋아지긴 하지만, 사실 모든 노년의 결말이 그렇게 따사롭지는 않은 게 사실이죠.


교수님이 화상을 입는 불운을 겪는 장면으로 시작해서 느닷없이 조각조각으로 이어지는 이야기의 얼개를 따라가는 것은 꽤 인내심이 필요하긴 해요. 물론 교수님의 인생을 만들어 주신 위대한 창작자인 폴 오스터의 인장과도 같은 창작 기법은 잘 알아요.

그분은 뭐랄까, 전형적인 선형 서사 구조를 따르는 이야기보다 솜씨 좋은 퀼트 작품에 가까운 느낌을 주는 방식으로 이야기 짓는 걸 좋아하시니까요. 그리고 어떤 면에서는, 그게 훨씬 교수님의 이야기에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어요. 파편적인 에피소드, 두서없는 연결. 노인의 기억이란 딱 그런 식으로 작동하니까요. 당연하다는 듯이 이야기를 이어가는 화자를 제외한 모두가 갑작스럽게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이야기의 호흡을 좇아가기에 바쁠 수밖에 없을 거예요.

부인께서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사고로 돌아가신 건 교수님의 삶을 지탱하는 커다란 축 하나가 사라진 셈이나 다름없는 일이었으니까요. 일상이 더 이상 예전처럼 흘러가지 않는 것도 당연합니다. 그러니 느닷없이 일어난 사소한 사건 하나가 어떤 회상으로, 망각으로, 새로운 삶에 대한 의욕과 갑작스러운 좌절로 이리 튀었다 저리 튀었다 하는 게 결코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아요. 이것 보세요,


서로 연결되지 않는 수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사방으로 튀고 있기 때문이다 –20쪽


교수님도 그렇게 생각하셨지요.


머리와 심장이 그 습격에서 살아남은 것은 그저 삐딱한 마음으로 히죽거리기나 하는 신들이 그에게 그녀 없이 계속 살아가도 좋다는 의아스러운 권리를 부여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제 인간 그루터기, 자신을 온전하게 만들어 주었던 반쪽을 잃어버리고 반쪽만 남은 사람인데, -37쪽


배우자와 관계가 좋았던 사람들일수록 그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한다는 이야기를 읽은 기억이 나요. 그 관계가 깊고 다정했던 만큼 빈자리의 공허가 큰 것을 이해할 수 있어요. 그래도 말이죠……


외로움은 사람을 죽여요, 주디스. 그건 사람의 모든 부분을 한 덩어리씩 먹어 치우다 마침내 온몸을 삼켜 버려요. 다른 사람들과 연결되지 않은 사람에게는 삶이 없는 것과 같죠. 운이 좋아 다른 사람과 깊이 연결되면, 그 다른 사람이 자신만큼 중요해질 정도로 가까워지면, 삶은 단지 가능해질 뿐만 아니라 좋은 것이 돼요. -123쪽


아, 그런데 열다섯 살 어린 이혼녀 주디스에게 이 말을 하면서 청혼하신 교수님의 모습을 생각하면 뭐라 할 말이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아찔해져요. 너무나 진심이고 너무나 절절한 이 말이 주디스에게 어떻게 들렸을지, 그분에게 어떤 감정을 떠 안겼을지를 생각하면요. 모든 면에서 마음이 잘 맞는 결혼생활을 했다가 아내를 잃은 교수님의 고립감과 지긋지긋한 남편을 간신히 떨궈내고 이제야 겨우 삶 같은 삶을 살고 있는 주디스의 처지는 결코 같은 것이 아니었거든요. 주디스에게 그 외로움은 바로 삶을 살만한 것으로 만들어 주는 숨구멍이었으니까요. 죄송한 말씀이지만 저는 잠시지만 그런 생각을 했어요. 어떤 종류의 행복은 사람을 편협하게 만드는구나. 세상을 바라보는 화각을 지극히 좁게 만들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요. 하지만 교수님은 성급하고 서툴렀을지는 모르겠지만 나쁜 사람이 아니었어요.


그와 애나는 같은 집에 함께 살면서도 둘 다 자유와 자기실현을 찾아낸 반면, 주디스는 신랄하고 허세가 심한 조 때문에 점점 숨이 막히는 느낌이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게 그녀가 뛰어드는 것을 망설이는 이유이고, 그녀가 말한다, 그는 얼른 뛰어들고 싶어 다이빙대에서 펄쩍펄쩍 뛰고 있는 이유이다. 그녀에게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녀는 말한다.
(…)
그래서 그는 자신의 논리를 계속 밀어붙이기보다는 뒤로 물러선다. -125쪽


저는 이 대목에서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안도의 한숨을 뱉을 수 있었죠. 교수님이 괜찮은 사람이어서 이 소설을 끝까지 읽을 수 있었어요.

도저히 좋아할 수 없는 사람이 이끌어나가는 이야기는 때론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것이 되곤 하거든요.


그렇게 또 하나의 인연을 고이 정리하고 교수님은 언제부터인가 떠오른 아이디어를 붙잡고 살을 붙이기 시작하죠. 전반부에, 마치 불시의 급습처럼 침입해 오던 과거의 기억은 이제 초고를 쓰기 위해서라도 일부러 찾아가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현재와 과거가 마구 뒤섞이고 죽은 부인이 1인칭으로 쓴 원고가 등장하면서 읽는 사람이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순식간에 길을 잃고 마는 미로 같은 이야기는 조금씩 정리되어 마침내 페이지가 얼마 남지 않은 순간 아마도 교수님의 유작이 될지도 모르는 어떤 책의 원고로 응축되죠.


제가 가장 놀랍게 생각했던 건, 한 노교수의 말년과 그가 어떤 방식으로 유작을 집필하게 되었는지를 치밀하게 쫓아간 이 한 편의 소설이 바로 폴 오스터의 유작이라는 사실입니다. 상당히 자전적이죠. 그래서 저는 교수님의 이야기를 쓰는 동안, 작가는 일종의 리미널 스페이스를 지나쳐 간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요. 진실은 아무도 알 수 없죠. 그냥 제 기분이 그렇다는 것뿐이니까. 그간 정말 고생하셨어요.


교수님도, 작가님도 모두 이제는 부디 평안하시기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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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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