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그리트 뒤라스, 연인
안녕, 마드무아젤.
여러 소설을 읽다 보면 처음부터 끝까지 이름 없이 존재하도록 쓰인 인물들을 간혹 만나게 됩니다. 그럴 때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요. 그들이 텍스트의 빈 공간 사이 어딘가에 기대어 숨을 죽인 채, 누군가 적절한 이름으로 불러주기를 기다리며 페이지 바깥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다고.
상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그런 생각을 할 때마다 폐가 꽉 조이는 것 같은 기분이 되곤 해요. 설명하자면 이래요. 우리가 누군가를 호명하는 순간, 그게 설령 2차원 평면 위의 인간이라 해도, 실체를 갖춘 누군가가 고개를 돌려 책 바깥의 독자와 시선을 맞추며 웃어주는 것만 같거든요.
그러니 이름이 존재하지 않는 어떤 인물을 불러 대화를 청하기 위해 어떤 호칭으로 불러야 할지를 생각하는 순간부터 머리가 복잡해지는 거죠.
왜냐하면 이름이란 살아 움직이고 흐르는 생명을 담기엔 항상 어딘가 부족하게 마련이잖아요. 특히나 처음부터 이름과 함께 존재했던 인물과 달리, 이름 없이 존재했던 인물을 뒤늦게 무어라고 부를지를 고민하는 일은 더욱 고민스럽죠.
당신을 포함한 익명의 인물들은 그들을 읽었을 수많은 독자들의 마음속에서 조금씩 다른 사람으로 존재하고 있을 텐데, 특정한 이름으로 그를 박제한다는 건 어쩌면, 대단한 결례일지도 모르고요. 그러니 이것은 나름의 고심과 타협의 결과랍니다. 이해해 주세요, 마드무아젤.
현재와 과거를 바람처럼 드나드는 시제를 구분하지 않고 읽어버리면 당신의 이야기는 퍽 이해하기 힘든 것이 되죠.
제가 퍽 어릴 때 말이에요. 이 소설이 영화로 나왔어요. 물론 충분히 짐작가능한 이유로 저는 영화를 볼 수 없었지만 스치듯 보았던 장면들 속에서 단연 돋보이는 당신의 모습에 한참 동안 홀려 있었죠.
분명 형식은 같은 소설인데도 어떤 인물들은 필름처럼 기억되고, 또 어떤 인물들은 스틸컷처럼 기억돼요. 어찌 보면 당연하죠. 이야기의 흐름을 주도하는 크나큰 사건들의 연쇄를 따라가는 일이 연속하는 장면을 바라보는 일을 닮았다면, 화자의 내면에 얽혀 있는 감정과 회한을 함께 회상하는 일은 순간 점멸하는 잔상을 붙들어두는 일에 더 가까우니까요.
검은 리본이 달린 펠트 중절모를 쓰고, 생사 원피스를 입고 가죽 벨트를 맨 당신이 나룻배 위에 서 있는 모습. 스스로를 원하는 모습으로 얼마든지 연출할 수 있는 당신이, 백인이 아닌 그가 조금의 머뭇거림을 두른 채 당신을 향해 걸어오는 모습을 바라보고 서 있는 모습을 찬찬히 넘겨봅니다.
어린 육체와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관능미와 자기 파괴적 욕망, 피폐한 애증처럼 도무지 하나로 융합할 수 없을 것만 같은 복합적인 결을 모두 품고 있었을 당신의 모습을 상상해 봅니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아름다움 때문이 아니고 다른 것, 그렇다, 다른 어떤 것, 이를테면, 기질 때문이라는 것을. 나는 나타내고 싶은 대로 나를 나타낼 수 있었다. 사람들이 내가 아름답기를 원하면 아름다워질 수 있었다. -25쪽
펠트 모자를 쓴 소녀가 강물의 레몬 빛을 온몸으로 받은 채, 난간에 팔꿈치를 괴고 나룻배의 갑판 위에 홀로 서 있다.
남성용 모자가 그 장면을 온통 장밋빛으로 물들이고 있다. 그것이 유일한 색깔이다. 안개가 뿌옇게 서린 강 위의 태양, 그 태양의 열기 속에 강기슭은 지워져 보이지 않는다. 강은 수평선과 맞닿아 버린 것처럼 보인다. 강은 유유히 흐른다. -29쪽
겉으로는 이처럼 고요한 모습과 달리 당신의 속이 시끄럽지 않을 때가 없었겠지요.
페이지를 넘기는 동안 잠깐씩 입술을 감쳐물었다가 시선을 들어 멀리 던질 수밖에 없는 건 뭣도 모르던 어릴 때와는 다른 눈으로 이 이야기를 읽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일 거예요. 그러니 중국인 남자를 만나고 있는 시간은, 실은 그냥 숨구멍이었을지도 모르겠어요. 어머니와 큰오빠에 대한 상념을 잊을 수 있게 만드는, 그런 시간.
또 그녀는 다른 종류의 어떤 사실도 안다. 즉 언젠가 그녀가 자신이 지니고 있는 그 어떤 책임을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때가 닥치리라는 것을. 그 문제에 대해서는 어머니가 아무것도 알아서는 안 되고 큰오빠나 작은오빠도 마찬가지다. 그날 그녀는 그런 사실까지 깨닫게 된다. 검은 승용차에 타는 순간, 그녀는 그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처음으로 그리고 영원히 가족으로부터 떨어져 나오게 되는 것이다. -45쪽
당신의 말대로 미래를 염두에 둔 화제를 입에 올릴 수 없는 관계에 대해 생각해 봤어요, 마드무아젤. 서로가 의식적으로 회피하는 화제가 있는 사이. 그 지점을 건드리면 위태위태하게 버티고 있는 관계가 순식간에 깨져버릴 수 있다는 걸 당신도, 그도 알고 있는, 그런 사이. 수면을 건드리지 않는 안개 같은 대화가 얼마나 공허한지 알면서도, 안개 주변을 맴돌 수밖에 없는 말들, 허망한 말들.
이제 그가 그녀에게 말을 하는 일은 거의 없다. 그녀를 향한 자신의 사랑에 대해 이야기한다 해도 그녀가 이해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사실 그것은 그 자신도 아직 잘 이해할 수 없는 사랑이었다. 그는 그 사랑을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가 없었다. 어쩌면 그는 그들이 지금껏 단 한 번도 서로 대화를 나누어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것인지도 모른다. -117쪽
훗날, 당신이 “몇 번의 결혼과 몇 번의 이혼에서 아이들을 낳고 몇 권의 책을 펴냈을 즈음” 그가 당신에게 걸어왔던 전화가 당신에게 무엇이었는지는 독자인 내가 끝내 알 수 없겠죠.
어쩌면 그 질문은 심장이 말라붙는 기분으로 여기에 도착한 독자에게 묻는 것일지도 모르겠고요. 하지만 아쉽다거나 답답하다거나 그렇지는 않아요. 그렇게, 어떤 궁금증과 안타까움은 그대로 페이지 사이에 묻어두는 게 결코 나쁘지 않다는 걸 이제는 잘 알거든요.
나는 끝내 당신의 이름을 알지 못한 채 이 편지를 닫아요. 그래도 괜찮아요.
어차피 당신에게도, 그에게도, 대화가 끝난 자리에 남은 건 말이 아니라 침묵이었을 테니까요. 이 편지도 그렇게 침묵 속으로 접어 넣을게요. 평화가 깃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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