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스타이그, 슈렉
친애하는 슈렉, 안녕하세요. 아마도 당신의 안녕함과 나의 안녕함은 억만 광년쯤의 개념적 거리감이 있을 테죠. 그러면 뭐 어때요. 피차 안녕한지 아닌지가 중요한 거죠. 안 그런가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 저는 마이크 마이어스의 애니메이션 버전으로 당신을 먼저 만났어요. 그리고 그 영화를 보고 4년인가, 5년쯤 뒤에 첫 아이를 키우면서 온갖 그림책을 사들이다가 그 유명한 영화 슈렉의 원작 그림책을 발견했죠.
세상에, 이 어마어마한 이야기의 원작이 그림책이라고? 호기심이 돋지 않는 쪽이 이상하지 않을까요?
그렇잖아요. 가장 동화 클리셰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동화적인 플롯을 가진 이야기가 어린이를 대상으로 쓰였다니.
물론 아이들이 이 그림책을 보고 얼마나 환호했을지는 너무 잘 알아요. 실제로 그런 어린이를 셋이나 바로 곁에서 아주 긴 세월 보아 왔으니까요. 하지만 뭐랄까, 고전적인 차원에서 교양이 넘치는 부모들이라면 어쩐지 질겁을 했을 거라는 불길한 추측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고요.
당신은 지금까지 살면서 본 온갖 캐릭터 중에서도 가장 이상하고 해괴하며 요상 망측하기까지 해요.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딱 들어맞는 형용사를 좀처럼 떠올릴 수 없을 정도로요.
평범한 세상의 상식으로 보자면 당신은 명백히 악당입니다. 제 몫의 나쁜 짓을 하도록 하게끔 발로 ‘뻥’ 차서 아들을 쫓아내는 부모님의 카리스마에 입을 꾹 다물고 페이지를 넘기고 있노라면 이거 이래도 괜찮은 건가, 마음속의 어른이 걱정스럽게 말을 걸어와요. 옆에서 그림을 들여다보며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던 아이들은 웃느라 숨이 넘어가고 있지만요. 이쯤 되면 냄새나고 더럽고 추하기까지 한 자신을 자랑스러워하는 당신의 모습에 굴복하지 않을 수가 없죠.
슈렉은 자기가 그렇게 메스꺼운 존재라는 게 얼마나 기분 좋았는지 몰라!
오, 맙소사. 이 당당함을 어쩌면 좋아.
그리고 이야기는 급물살을 탑니다. 세상에, 이게 웬일이에요. 아무도 들어가지 못하게 경고의 말이 붙어있는 숲에 쳐들어간 당신은 가엾은 용을 기절시키고 맙니다. 너무하지 않은가요. 자고로 이 장르에서 브레스 breath는 용이 전유하는 필살기인데 그걸 이렇게 새치기를 해버리면 어쩌자는 거예요. 이 페이지의 압권은 악취를 견디지 못하고 쓰러지는 용의 혼미한 표정이죠. 흡사 작가인 윌리엄 스타이그가 용에 빙의해서 당신의 공격을 대신 맞고 그려 낸 얼굴이 아닐까 의심스러울 정도거든요.
아무튼, 용을 쓰러트리고 숲을 지난 당신은 쓸만한… 쓸 만한… 종자와 말을 반쯤 섞어 놓은 것만 같은 ‘궁시렁대는’ 당나귀를 만나게 되고요. 저는 애니메이션의 동키도 참 좋아하지만, 이 그림책의 당나귀 표정도 아주 좋아해요. 도대체 이런 얼굴은 어떻게 그릴 수 있는 건지, 정말이지.
당나귀는 당신을 태우고 보무도 당당하게 ‘미친’ 성으로, ‘역겹게’ 생긴 공주를 만나게 해 주려고 데려가고요.
지금까지 간신히 정신을 붙잡고 낭독을 하던 부모도, 이 대목에 이르면 정신이 혼미해집니다. 그런데 그것도 처음 읽어줄 때나 그렇고요, 수차례 반복하다 보면 같이 깔깔거리면서 줄줄 읽게 돼요. 이렇게 말맛을 잘 살린 그림책은 아주 드물거든요.
보통의 그림책이라면, 아마도 당신들은 세상에서 가장 멋지고 우아한 주인공들이 되었겠지만 우리의 윌리엄 선생님은 그런 고리타분한 결말을 선호하지 않아요. 그래서 슈렉, 당신은 ‘너무나 못생긴’ 공주님을 아내로 맞이하고 그 공주님은 ‘너무나 소름끼치는’ 외모의 당신을 기꺼이 남편으로 맞아 영원히 무시무시하게 살았다죠. 이 얼마나 통쾌하고 끔찍(?)한 해피엔딩인지.
이토록 꽉 찬 멋진 해피엔딩을 맞이한 당신과 공주님께 사소한 부탁 하나쯤 해도 되겠죠?
바라건대, 부디 앞으로도 청결 같은 사소한 건 잊어버리고, 주위에서 뭐라고 압박하든 멋대로 무시무시한 라이프스타일을 영위하면서 사시길 바라요. 그거야말로 슈렉과 공주님이 세상에 낼 수 있는 가장 짜릿한 균열이며 카타르시스니까 말이죠.
두 사람(?)만큼 멋지고 근사하고 환장(…)스러운 커플이 또 나타날 가능성은 지극히 희박하리라 예상하거든요. 다른 사람들의 기대 따윈 가뿐히 무시하고 세상을 살아가는 당신들의 방식에는 거의 철학적이기까지 한 무언가가 있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예요.
물론, 터무니없는 말인 건 알아요. 하지만 우리에겐 그런 통쾌한 순간이 종종 필요하거든요. 그래서 당신의 존재가 고마워요.
반가워해줄 리 없다는 건 아주 잘 알지만, 우울해질 때는 종종 찾아갈게요. 가까이 가진 않고, 늘 그랬듯 페이지 건너편에서만요. 누가 날 겁주는 건 딱 질색이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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