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 패칫, 벨 칸토
안녕, 세사르.
이름 앞에 어떤 말을 붙일까 잠시 고민했어요. 뒤늦게 발견한 재능과 함께, 꿈꾸는 법을 배우기 시작한, 이런저런 말들이 떠올랐다가 그대로 퐁퐁 터졌죠. 어떤 말도 세사르의 이름 앞에 붙일 수가 없더라고요. 세사르의 마지막을 생각하면 그럴 수가 없죠.
긴 이야기들은, 사실 도입부를 지났다 싶은 지점에 이르면 내가 도착하게 될 어떤 목적지를 어렴풋하게나마 보여주기도 해요. 아주 강력한 반전이 기다리고 있는 이야기가 아닌 이상에야 조금은 짐작하게 된단 말이죠.
특히 「벨 칸토 Bel Canto」처럼, 부통령의 자택에 난입한 테러리스트들이 외교관, 사업가, 정부 관계자들이 가득한 이곳을 무력 점거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가 어디를 향하게 될지를 짐작하는 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에요.
이 소설에는 절로 시선을 끄는 인물들이 잔뜩 등장하죠. 품위 있고 예술에 대한 이해와 식견이 높은 호소카와 씨를 위시하여 무장 세력과 인질들 사이의 소통을 돕는 통역가 겐, 테러리스트 중 한 사람인 벤하민 장군과 젊은 테러리스트이자 겐과 사랑에 빠지는 카르멘, 음악을 통해 도저히 섞일 수 없을 것 같았던 두 개의 집단 사이에 인간적인 공감과 유대를 놓는 성악가 록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읽은 지 수년이 지났음에도 내게 가장 오래 마음에 남아 기어이 흔적을 다시 찾게 만든 인물은 다른 사람이 아닌 세사르였단 말이죠. 어째서일까요. 거의 마지막에 이르러 잠시 등장했다가 장렬하게 산화하는 어린 청년은 왜 그렇게 오랫동안 누군가의 마음에 남아있을 수 있었을까요?
인질 억류 사태는 양측의 예상을 모두 비껴나가 퍽 오래 이어집니다. 필요에 의해서만 주고받았던 짧은 대화는 조금씩 길어지고 긴장은 조금씩 녹아내립니다. 록산의 요구에 의해 일촉즉발의 일상에 기묘한 루틴이 자리 잡게 되죠. 그것은 다름 아닌 록산의 노래 연습이었습니다.
"이 비참한 곳에 갇힌 지 벌써 두 주가 다 돼가요. 전 몸이 아플 때를 빼곤 한 주도 노래를 쉰 적이 없어요. 이젠 연습을 시작해야 해요." -170쪽
오페라 가수이니, 록산의 요구는 당연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테러리스트 집단에게 억류된 상황만 아니었다면요. 하지만 이곳은 부통령의 자택이고, 그들이 인질이 되었던 날 밤 록산이 노래하기로 되어 있었던 만큼 그녀가 연습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은 갖추어져 있었던 셈이죠. 그렇게, 록산 코스는 실제로 이런 기막힌 상황에서 노래 연습을 재개하게 됩니다.
놀랍게도 이 작은 요구 하나가 사람들의 마음에 잔잔한 물결을 일으키게 되고요. 록산의 노래는 기어코 테러리스트들과 인질 사이의 경계마저 녹여버리죠. 그녀의 노래가 사람들 마음에 쌓여갈수록 공포와 권력으로써 만들어졌던 관계가 기묘하게 변화합니다. 인위적으로 세상과 단절되어 버린 이 작은 사회 안에서, 그들은 이곳의 새로운 시민처럼 보이기도 하고요. 한층 느슨해진 관계 속에서 마침내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다른 병사들이 먼저 주방을 나가고 겐과 록산과 티보도 자리를 뜨자, 요즘 그들을 인질이라기보다는 어른으로 생각하기 시작한 세사르는 일을 마무리지으면서 로시니의 곡을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301쪽
오늘 아침 록산이 이 곡을 몇 번이고 반복해 연습한 덕분에 그는 단어 하나하나를 모조리 외울 수 있었다. 모르는 나라 말이었지만 상관없었다. 그는 이 노래의 의미를 알았다. 가사와 음악이 한데 어우러져 그의 일부가 되었다. -301쪽
세사르, 당신이 나오는 대목은 고작 70여 페이지에 불과해요. 그런데도 이 소설에서 가장 강렬한 인물과 에피소드의 하나로 남아있죠.
그리 길지 않은 생을 살아오면서 그런 고급예술을 접할 기회가 없었던 소년이 세계 정상급 소프라노의 노래를 듣고 당사자가 화들짝 놀라 직접 가르쳐보고 싶다는 말을 하게끔 만들 정도의 눈부신 재능을 내보였다는 건 그야말로 소설 같은 일이죠. 하지만 여기에서 우리는 현실을 봅니다. 재능이라는 씨앗이 땅을 항상 만나지는 못한다는 슬픈 현실을요. 아마 저는 그 사실에 깊이 감응했던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분명 아주 잠깐의 환상에 불과하겠지만, 테러리스트 소년 세사르는 록산에게 개인지도를 받게 됩니다. 그리고 태어나 처음으로, 당신은 꿈을 꿉니다. 평범한 아이라면 성장하면서 누구나 한 번쯤 당연하게 품는 꿈이죠. 세계에서 내가 가장 빛날 수도 있다는, 허무맹랑하지만 그 자체로 하나의 특권인 백일몽을요. 음악은 당신에게 처음으로 다른 이름을 줍니다. 테러리스트라는 정체성을 넘은 새로운 가능성을요.
"저 애의 노래를 들으면, 우리가 스스로의 가능성만 깨달았어도 얼마나 훌륭한 일을 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돼." -403쪽
그러니 당신의 노래를 듣고 중얼거렸던 벤하민 장군의 이 말은 얼마나 무거운지요.
이야기는 어느새 말미에 이르러 있습니다. 초반에 인질들이 그렇게나 기다렸던 정부군이 마침내 급습했을 때, 그래서 총탄을 맞은 당신이 쓰러졌을 때 록산은 '이 시대의 가장 위대한 성악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소년'에게 기어가 단단히 부둥켜안는 위험을 무릅썼던 것이겠죠. 헤아릴 수 없이 슬픈 장면이 많았지만 이것은 여전히 가슴 어딘가를 무겁게 잡아당기는 장면으로 남아 있네요.
좋은 소설은 복합적인 층위의 주제를 다루고 있다고들 하거든요. 이 책도 그래요. 그중에서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로 가장 마음에 남았던 것이 세사르의 이야기였던 거겠죠.
개인적인 차원으로 압축되었다곤 해도, 이 소설에서 다루는 핵심 명제 중의 하나가 바로 여기에 담겨 있으니까요. 오래도록 독자의 내면에서 메아리칠 바로 그 질문이요. 어떤 독자는 나처럼 세사르를 기억하는 대신 카르멘을, 록산이나 겐을 기억할지도 모르죠. 그 또한 아름답고 좋은 일이 아닐까 해요. 아름다운 음악이 영원히 함께 하기를. 평안히 쉬길 바라요, 세사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