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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화 Jan 08. 2024

독자를 초대하는 여백

클레어 키건, 맡겨진 소녀

어떤 책의 추천사나 서평을 읽을 때 ‘아름답다’라는 표현을 발견할 때가 있다. 아름다운 글이라고 평가하는 기준은 저마다 다르겠으나 내 경우에 그 아름다움의 발견이란, 달리 표현하여 새로운 앎에 닿아 있다. 미처 보지 못했거나 알지 못했던 생의 조각들, 생각의 그림자, 지금껏 누구도 발견한 적 없던 실체와 관념의 마리아주 같은 것.      


예술의 역할이란, 김영랑 시인이 말씀하셨듯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아내’처럼 시인 이전에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고 귀히 여기지도 않았던 삶의 장면들에, 그것이 결코 하찮지도 흔하지도 않은 낱낱의 진주알임을 증명하는 데 있다고 믿어 왔다. 지금도 믿는다. 


바로 그런 소설 한 편을 소개하려 한다. 100 페이지가 채 되지 않는 단편소설로, 출산이 목전에 닥친 가정의 부모가 여자아이를 부유하고 외로운 친척 부부에게 맡기는 내용이다. 요약하자면 그게 전부다.


맡겨진 소녀 | 저자 Claire Keegan |  출판 다산책방 | 발매 2023.04.21.


이 아이가 태어난 이래, 일시적으로 그렇게 맡겨졌다가 집으로 되돌아올 때까지의 삶을 한 권의 책이라고 비유한다면 소녀가 위탁 양육되었던 그 짧은 여름은 책 사이에 숨겨진 놀라운 팝업 아트 페이지라고 할 만하다. 

부모가 주지 못했던 것을 한 철 머무르는 위탁가정에서라도 느끼고 배울 수 있는 것을 행운이라 불러야 할까, 불운이라 불러야 할까. 일찍 철이 든 듯한, 그럼에도 아직 분명히 어린 화자 덕분에 독자는 새삼스럽게 어른들의 감정의 복잡한 단면도를 직시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화자가 아이인 소설을 읽을 때면 이렇게 흠칫하는 순간들을 만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편하고 낯부끄러운 홧홧함을 안고, 계속 읽자고 권유하고 싶다.


“다른 건 또 안 물어봤어?”
“냉동고가 꽉 찼냐고 물어봤어요.”
“그럼 그렇지.” 킨셀라 아저씨가 말한다.
“다른 말은 안 했어?” 아주머니가 묻는다.
나는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뭐라고 하던데?” -p.68     


책의 표지처럼, 단조로운 청회색조로 물들어 있던 소녀의 삶이 새로운 국면을 맞기 위해서 햇볕에 말리는 과정은 어찌 보면 당연한 절차 같기도 하다. 그러므로 아이가 저지른 지난밤 실수를 자신의 실수로 치부하며 함께 매트리스를 말리러 가는 장면은 의미심장하다.      


“매트리스가 낡아서 말이야.” 아주머니가 말한다. “이렇게 습기가 차지 뭐니. 항상 이런다니까. 널 여기다가 재우다니, 도대체 내가 무슨 생각이었을까?”     
우리는 매트리스를 끌고 계단을 내려가서 햇볕이 내리쬐는 마당으로 나간다. 개가 다가와서 킁킁 냄새를 맡더니 뒷다리를 들려고 한다. -p.36     


여기에서부터 작가의 문장이 묘사하는 세계가 색을 입기 시작한다. 몇 줄의 문장을 따라 행간에 빛과 색이 스미는 것 같은 느낌이 어떤 것인지 궁금하다면 부디 천천히 산책하듯 이 소설을 읽어 나가 주기를.      


이동진 평론가가 말했듯, 최후의 두 문장은 ‘독자가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전체적 감상이 달라질 정도로 강력’ 한 게 맞다. 웬만한 반전 있는 소설들만큼이나 둔중하게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을 준 엔딩이었다. 아연해진 기분으로 책을 내려놓으며 생각했다. 그래, 문학이란 게 이런 거였지.      


아주머니의 손은 엄마 손 같은데 거기엔 또 다른 것, 내가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어서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는 것도 있다. 나는 정말 적당한 말을 찾을 수가 없지만 여기는 새로운 곳이라서 새로운 말이 필요하다. -p.25     
언니들은 옥외 화장실의 박공벽에 흙덩이를 던질 거고, 비가 오면 흙덩이가 물러져서 진흙이 될 것이다. 모든 것은 다른 무언가로 변한다. 예전과 비슷하지만 다른 무언가가 된다. -p.33     
아저씨가 웃는다. 이상하고 슬픈 웃음소리다. 나는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넌 아무 말도 할 필요 없다.” 아저씨가 말한다. “절대 할 필요 없는 일이라는 걸 꼭 기억해 두렴. 입 다물기 딱 좋은 기회를 놓쳐서 많은 것을 잃는 사람이 너무 많아.” -p.73               

2024.1.8 최초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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