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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화 Jan 03. 2024

이 책의 어디가 그렇게 좋았어?

레이먼드 카버, 대성당


최초작성_2022. 10. 17. 14:22 



어쩌다 보니 주변에 책을 가끔 추천하게 되는 일이 있는데, 좋은 책 알려줘서 고맙다는 말만큼이나 자주 듣는 말이 바로 저 말이다. 이런 말은 뉘앙스가 중요한데, ...^^;; ... 다행인지 심히 유감이라는 말투보다는 진심으로 궁금해하면서 물어볼 때가 잦았다. 음, 이것도 아닌가. 역시 별로였던 걸까... 어쩌겠습니까요. 


대성당 | 저자 레이먼드 카버 | 출판 문학동네 | 발매 2014.05.23.



최근에 저 질문을 받았던 건 아마도 저는 취미로 책을 읽습니다, 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다들 아하, 해 줄 만한 바로 그 작가- 레이먼드 카버의 「대성당」을 추천한 이후인데, 대략 두어 달 전쯤이었다. 

이 책을 꼭 읽어보라고 추천하면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단편은 표제작인  <대성당>이라고 굳이 덧붙였다. 보통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을 좋아하지만, 나는 <대성당>을 제일 좋아한다고. 그리고 (이건 고마운 일이지만) 내가 추천한 책이라면 대부분 챙겨 읽어주는 이웃이 세상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대성당>의 어디가 그렇게 좋았어? 



어려운 질문엔 누구나 꿀 먹은 벙어리가 되듯 나도 충실하게 클리셰적으로 답변을 대신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 정말 아무 생각이 안 났거든. 내가 왜 그 작품을 유달리 좋아했을까. 와, 뭔가 근사한 대답을 해 줘서 감탄의 눈빛을 뽑아내고 싶었지만, 그 순간엔 함량미달이었다. 얼굴이 값싸게 팔린 느낌이었다. 왜 아무 생각도 안 나는 것이냐, 이 쓸모없는 머리는. 평소에는 아무말대잔치 만렙이면서, 필요한 순간엔 왜 쪼렙뉴비가 되는 건데.



필요한 때에는 못 하고 다 지나간 이후에 미련철철로 매달리는 이상한 기질의 소유자는(그래서 학교 다닐 때 수업 종종 째고 잘 놀다가, 나이 먹을 만큼 먹고 다른 할 일 많은 지금에서야 공부를 열심히 하(고싶어하)는 정말 이상한 어른이가 되었습니다. 자랑 같은 안 자랑...) 그 뒤로도 곰곰 스스로의 취향을 탐구하게 되었다. 그러게, 내가 왜 그걸 유난히 좋아했을까? 


그리고 도대체 며칠을 고민했는지 기억도 안 나는 어느 날, 마치 무언가 큰 깨달음이 온 것처럼 결국 나는 풀리지 않던 질문의 답을 구하고야 말았던 것이었다... 감격... 간단하게 한 마디로 줄여 말하면 그것은 에피파니였다. 아, 되게 구닥다리 답변이지요, 압니다. 아는데, 같은 답이라도 답을 구하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 다른 법 아니겠어요?



협소하기 짝이 없는 세계에 갇혀 사는 사람이 있다. 어떤 계기로든 이 세계는 안쪽으로도 겉면으로도 조금씩 확장하게 되어 있다. ★


다만 자꾸자꾸 커질수록, 껍질은 조금씩 굳어간다. 내가 지각하고 인식하는 것들이 내 세상을 구성하고 기능하게 하는 유일무이한 골조처럼 단단해진다. 그러나 곧 한때 나의 세계를 키워주고 떠받쳐주었던 이 구조물이 어느 순간 유연한 사고를 차단하는 감옥으로 변하는 순간이 온다. 그리고 그때 나를, 혹은 당신을 유폐하고 있던 협소한 공간에서 구해주는 새로운 만남의 순간이 (적어도 내게는) 기적적인 에피파니가 된다. 



그러므로 "it is really something"을 말하는 것은 <대성당>의 주인공인 동시에 내가 되는 것이다. 그 기막힌 합일의 순간이란, 등줄기가 꼿꼿해지게 짜릿한 그 감각은 이 단편소설에서만 느낄 수 있는 것이고, 그게 바로 <대성당>이 이 단편집의 대미를 장식하는 이유인 것이다. 극적으로 휘두르던 지휘봉이 딱 멎고 오케스트라 단원 모두가 숨을 멈추고 음을 붙드는 순간, 가장 팽팽하게 조여둔 긴장이 스르륵 풀리면서 깊게 농축된 감동의 무게가 쏠려 박수소리에 실리기 직전의 짧은 그 순간이 저 문장 하나에 모두 잠겨 있다. 




내게 찾아온 기적을 홀대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도 없겠지(도의 아닌가). 그러므로 <대성당>은 내가 이 단편집에서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읽어온 단편들 중에서도 가장 좋아하는 단편인 것이다. 실로 주관적인 잡설이지만 개인적으로 해결 못 하던 문제를 결국 풀어낸 자기만족에 잔뜩 취했으므로, 오후도 이 기분 내내 보내볼 참이다. 홍야홍야... 



★ 여기에 넣고 싶었던 뱀발 


다만 양쪽이 고르게 늘어나지 않으면, 머리와 마음은 텅 빈 채 비만해진 자아를 부둥켜안고 거들먹거리든가 인간표현형이 좀 어눌하고 후줄근해져서 소심해지든가... 뭐 이렇게 슬퍼지겠지. 그리고 누구나 알다시피, 균형 잡힌 발전은 누구나 부르짖지만 인간적으로는 성취하기 힘든 목표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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