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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화 Jan 22. 2024

당신 인생의 금과옥조

곽아람, 매 순간 흔들려도 매일 우아하게

그런 작가가 있다. 어떤 글을 썼건 그가 쓴 책은 모두 읽게끔 만드는 작가. 전작주의자라고 말하기는 어딘가 애매하지만, 여하간 나의 감수성이건 이성이건 관심의 촉이건 어딘가에 절묘하게 코드가 잘 맞아 들어가는 작가. 문학을 제외하고 말하자면 정혜윤 PD, 최혜진 작가, 김혼비 작가, 이슬아 작가, 그리고 지금 이야기하고 싶은 곽아람 기자가 그들이다.      

곽아람 작가님, 혹은 기자님의 글을 처음 접했던 것은 「어릴 적 그 책」을 통해서다. 어렸을 적 책 좀 읽은 어린 독서가라면 이 책을 읽으면서 ‘어딘가 그리운 느낌’이 들지 않기는 어려울 것이다(저 표현에 굳이 작은따옴표를 친 이유를 짐작하신다면, 그리고 찰나 웃으셨다면 저 표현에 대한 감상이 저와 비슷한 분이시겠군요. 반갑습니다. 저는 늘 저 수식어를 보면 낯간지러움을 넘어선 간질간질함에 몹시 힘들었답니다...). 여하간 나는 그 책을 읽으며 저자에게 홀딱 반했고(사, 사, 사랑합니다 작가님...), 그가 어린 시절의 추억 어린 책들을 다시금 펼쳐주어서 몹시 반가웠다. 나 또한 특별한 애착과 기억을 갖고 있는 책들이었기에. 사람은 자신과 어떤 종류의 경험과 흡사한 서정을 소유한 사람에게 절로 반달눈을 할 수밖에 없는 존재니까.      


매 순간 흔들려도 매일 우아하게 | 저자 곽아람 | 출판 이봄 | 발매 2021.06.10.


서문을 읽다가 어느 지점에 이르러 나는 정말로 크게 소리 내서 웃고 말았는데, 까닭은 이렇다. 

이 책의 편집자는 저자에게 ‘여자의 야망을 주제로, ’ 자기계발서‘적인 독서 에세이를 써 보자’고 제안했다고 한다. 여자의 야망. 어떤 야망? 야망은 자기계발과 병존 가능한 컨셉일까? 사람에 따라 다르겠으나, 대개 야망이라고 하면 현실성과 비현실성이 대략 3:7 정도 섞인 낱말이 아닐까, 나는 생각했다. 자고로 야망이라 함은 다소 이루기 힘들더라도 일단은 ‘꿈이니까 크게 질러봐’적인 뉘앙스가 있어야 제맛 아닌가. 

이미 공중에 도약한 발의 이미지가 있는 말이다. 한쪽 발은 아직 땅에서 채 떨어지지 않았더라도.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야망의 실루엣이다. 그러나 자기계발은 어떤가?      


내가 인식하고 있는 자기계발이란 자신이 처한 현실을 철저하게 분석해서 하나씩 딛고 올라갈 수 있는 계단을 만드는 것과 비슷했다. 자기계발의 출발점이 내가 발 딛고 선 사회문화적 좌표의 GPS를 읽는 데서부터 시작한다면 야망의 출발점은 일단 내가 도착하고 싶은 지점에 미리 날아가 있지 않던가. 그러니까 자기계발과 야망이 가진 시점은 달라도 너무 다른 것이었다(한 번 더 강조하는데, 제 생각입니다). 화자는 동일한 사람이어야 하는데. 작법서에서는 이런 것을 ‘시점 넘나들기’라고 한다. 화자의 말이 독자에게 신뢰성 있게 다가가려면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 

자기계발의 캐치프레이즈가 ‘어제보다 조금 더 나은 내가 되자’를 지향한다면, 야망은 ‘일단 성공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해 보자’하는 드라마적 상승을 지향하는 것처럼 보였다. 


조금 늦지 않았나 싶은 해명을 하나 덧붙이자면 ‘야망을 이루기 위한 착실한 자기계발’이 말이 안 되는 명제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사전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자기 나름의 뜻풀이사전을 마음속에 끼고 살기 마련이며, 어떤 사람들은 그들이 지금껏 쌓아 올린 글들과 말들로 인하여 무엇에 대해 특정한 해석을 품고 있을 수밖에 없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가끔은 성공을 위해 표독스러워지기를 요구한들, 타고난 성정이 다정한 까닭에 그럴 수 없는 사람이 존재하는 것이다. 곽아람 작가께서 한결같으신 성품과 일관성 있는 주제의식을 갖춘 시점인물이었던 덕에, 이 책은 초기의 기획에서는 핀트가 나갔을지언정 훨씬 진정성 있고 작가의 장점이 그대로 살아 있는 책이 된 게 아닐까.     


아무튼 그런 저런 감상을 뒤로하고 죽죽 읽어나가다, 109 페이지에 이르러 눈이 반짝 뜨일 수밖에 없었는데 이유는 다음과 같다.      


어린 시절 읽었던 계몽사 문고에서, 대부분의 책 번역자 이름이 ‘신지식’이었다. ‘새로운 지식’이라는 뜻일까? 그 특이한 이름을 잊을 수 없었다.


이에 대해 내 기억을 소환해 보자면, 나는 꽤 나이가 든 뒤에 이 분의 성함을 기억하고 있긴 했으나 이런 특이한 이름이 실존 인물일 리가 없다고 혼자 멋대로 결론을 내렸던 듯하다. 그건 역시 아마도 그 시절 서브컬처의 즐거움을 누리게 해 주었던 수많은 해적판에 저자명으로 올라와 있던 기기묘묘한 이름들 탓도 있었다고 비겁하게 말해 보겠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분은 실존 인물일 뿐만 아니라, 누구나 알 법한 어떤 소설가에게 상당한 감화를 준 작품을 집필하기도 하셨다.      

113 페이지를 읽어가다가 나는 정말로 헛숨을 들이켰다. 그 소설가는,      

김훈이다.


맞다. 그 김훈이다.


「남한산성」, 「칼의 노래」를 쓴 바로 그 김훈 작가.      


순정한 문장과 등장인물들이 연약하게 나부끼는 글을 마음에 묻었던 10대 소년은 자라서 누구나 인정하는 대단한 소설가가 된다.      


나는 이 연결성과 미약한 인연의 끈에서 그만 마음이 울렁이고 만다. 알지 못하는 사이에 사람과 사람은 얼마나 많은 영향을 주고받는가. 내가 써 내려간 몇 줄의 글이 누군가에게 어떤 파장을 남기는가. 그런 것들을 마치 한 폭의 추상화처럼 눈앞에 그려보다 보면 이런 것이 아름다운 게 아닌가, 인연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김훈이 읊은 구절은 신지식 단편 「아카시아」의 한 문장이다. 내가 그 얘기를 했더니 신지식 선생은 깔깔 웃으면서 “김훈이라는 작가가 내 소설을 좋아했단 이야기는 전해 들었어요. 그런데 한 번도 만나진 못했죠. 그 시절엔 워낙 읽을 게 없었으니까. 그이는 훌륭한 작가기 되지 않았어요?” 했다.
가슴을 앓는 창백한 소녀들이 등장하는 하얀 레이스 커튼 같은 소설, 인기와 함께 감상적이고 유치하다는 비판도 있었다. 신지식 선생은 깨끗하게 “지나치게 감상적이니까요. 내 세계가 그만큼 좁았던 모양이지요. 그래서 사람들이 「하얀 길」을 훌륭하다고 하면 내가 그렇게 창피한 거예요. 부모님과 떨어져 있던 기숙학교 시절 슬프고 외로울 때마다 일기장에 끄적인 글이었어요” 했다. 선생의 단정한 자기성찰과 반성에 나는 감탄하였다. -p.114     
“신지식의 글들은 짓밟히고 배고팠던 내 소년 시절의 위안이었다. 신지식은 슬픔의 힘으로 슬픔을 위로했다. 내 소년 시절에는 신지식의 「하얀 길」과 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의 모험」이 있었다.” -p.119     


이런 글이라도, 이렇게 적어 내려가다 보면 기억에 한 줄을 보탤 것이다. 언젠가는 이 책을 읽으며 느꼈던 감정의 온갖 파고조차 기억나지 않는 날이 올 테지만, 그날이 하루라도 늦게 오는 데에 지금 들인 한 시간이 도움이 되어줄 것임을 나는 안다. 이 글을 쓰는 동안 또 하나의 마음이 동그랗게 뭉쳐져 어딘가에 소중히 들어앉을 것임을 알기에, 그 시간이 아깝지 않다. 곱고 사랑스러운 책이다. 내가 쓴 별 볼 일 없는 한 편의 리뷰를 통해 또 누군가가 이 책을 펼쳐본다면 그 역시 고맙고 기쁠 것이다.       


2024. 1. 17 최초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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