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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화 Jan 24. 2024

의도적인 건 아닌데 어째서죠

곽아람, 공부의 위로

;;; 곽아람 작가를 제가 정말 좋아하긴 하나 보네요...


2022. 10. 24. 12:11 최초작성

공부의 위로 | 저자 곽아람 | 출판 민음사 | 발매 2022.03.20.


공부라는 단어, 개념, 행위 또는 지독한 오해. 


어느 방향으로건 우리는 항상 이 낱말과 모종의 관계를 맺고 있으며 대개의 경우 부정적이다. 이때 우리가 손에 쥘 수 있는, 공부의 가치와 공부의 필요성과 공부의 아름다움과, 그 무엇이 따라붙든 만 가지 긍정성을 고취시킬 만한 책으로 꼽기에 무척 적절하다. 


우선 공부가 고득점을 위한 어떤 스킬을 체득하는 방법론으로 자리 잡아버린 이 시기에, 이 뿌리부터 어떻게 뽑아봐야 하지 않겠는가. 공부를 변호하고 두둔하려면 진작 곰팡이 슬어버린 오래된 저 인식부터 어떻게 해야 하는 거고. 


뭐 어찌 됐건 공부가 힘들고 골치 아픈 건 사실이다. 게임이든 현실이든 렙업이 공으로 되는 건 아니잖나. 기실 현실이 더 힘들다. 세이브가 잘 안 되니까요. -_-... 나 이거 공부한 적 있는데, 본 적 있는데, 읽은 적 있는데, 심지어 암기한 기억까지 나는데 내용이 유실되는 일은 부지기수다. 이쯤 되면 뇌내분실, 내지는 지식누수다. 이걸 방지하는데 아주 좋은 (노가다) 방법이 있다. 유사컨텐츠 무한반복(다른 말로 반복암기), 일명 머릿속 거미줄 치기다. 그럼 원체 매끈 탱탱하게 태어나버려 수시로 누수가 일어나는 뇌라도 어느 정도 평균값으로 커버칠 수 있다. 그러나 누가 시켜서는 불가능한 것이 바로 이 반복 작업, 다른 말로 복습이라 하는데 공부 공력 좀 되는 고수들이라면 필히 얻어야 할 내공이라 하겠다. 여기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 자발성, 요즘 한참 잘 팔리는 말로 자기 주도성이라고도 한다(예전만큼은 아닌 것도 같다만). 지루한 공부의 여정 끝에 어느 순간 즐거움의 영역으로(누가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공부를 계속하게 하는) 진입하려면 반드시 얻어야 하는 티켓의 이름이기도 하다. 찰리가 손에 쥐었던 골든티켓만큼 득템 하기 어려운 그 자기 주도성이라는, 유니콘 같은! 공부의 희열감이라는 건, 대체 어디서 찾을 수 있는 것인가?



곽아람 작가도 서문에서 언급했지만, 공부를 업으로 삼는 분들은 어쩔 수 없이 여기에 정서적 세금을 성실히 납부하고 계실 터이므로 즐거움이라든가, 자발성... 같은 말이 아주 씁쓸하게 읽히실 수 있을 텐데... 취미생은(?) 꾸벅 고개를 숙여 사죄하고 계속하겠습니다. 



여하튼.


굉장한 장광설을 늘어놨는데, 사실 하고 싶었던 말은 이거다. 입시공부는 진짜 공부가 아니라 하고, 대학 가서 하는 공부가 진짜배기다, 이렇게들 말 많이 하는데, 입시공부도 공부 맞다고 생각한다. 다만 컨텐츠적으로 개인의 내실을 다지는 공부라기보다, 공부를 하기 위한 테크닉을 연마하기 위해 (재미없지만) 해야 하는 방법론적 공부인 성격이 짙다. 다만, 수험생들을 옆에서 종종 보게 되다 보니 알게 되었는데, 그것조차 본인의 지식 인프라를 만드는 원재료로 이용하는 학생들이 존재한다는 거다. 그러니까 등급을 올리기 위해서 잘 푸는 스킬을 익히는 걸 넘어서 스킬을 익히는 데 동원된 부지식들까지 야금야금 자신의 지적자본탱크에 차곡차곡 저장하는... 그런 놀라운 사람들이 있다. 이쯤 되면 정말 뭔가를 알아가는 재미, 스스로를 키워가는 재미를 일찌감치 깨달은 공부의 천재들 아닌가. 나는 그걸 스물다섯이나 먹고서야 알았는데 세상 참 불공평하기도 하지(그러니까 대학에서는 공부를 그다지 열심히 안 했다는 자백이기도 하다. 어머니 아버지 죄송합니다, 등골브레이킹하며 등록금 빼먹고는 동방에서 전공생처럼 기타만 쳤어요. ㅎㅎㅎ) 



이 얘기를 왜 했는가, 작가가 바로 그렇게 공부를 했고 공부로써 자기를 다져온 사람임이 여실히 읽히기 때문이다. 서문에서도 드러나듯 그는 고등학생 시절뿐만 아니라 대학에서까지 우수한 학점을 자랑했던 모범생 중의 모범생으로 살아왔다. 마흔에 이르러서는 공부의 쓸모와 위로, 대학교육이 한 인간을 어느 정도까지 성숙시키고 교양인으로 키워낼 수 있는지를 증명하고자 했다. 


공부라는 낱말이  모호한 추상성으로 정체를 감춘 탓에 공부할 의욕이란 걸 북돋아 준 적이 없어 공부의 필요성을 느낀 적이 없으나 어쩐지 공부를 안 하면 안 될 것 같은 앞뒤 안 맞는 괴로움에 머리를 쥐어뜯어본 적이 있다면, 이 책을 추천하고 싶다.



공부라는 것이, 다소 강제적이고 압축적인 주입과정이 동반될 수는 있으나, 그 또한 교육의 본질적 목적에 부합하기 위해 교육 초기에는 어느 정도 필수적인 과정임을 이해하고, 대학을 왜 가야 하는지 목적이 흐리멍덩한 어린 학생들, 대학이 내게 뭘 남겼던가 역시 기억이 희미해진 오래 묵은 졸업생들, 현재 교육자의 입장에서 때때로 권태기에 빠지는 이들에게 건네는 냉정하고 차분한, 야무진 조언도 되겠다. 



앞에서 던졌던 질문에 답을 하자면, 공부의 희열감은 (진심 농담 아니고) 나를 죽어라 물 먹이던 스테이지를 클리어했을 때 느끼는 그 기분과 비슷하다. 정말로 공부는 게임과 비슷한 면이 있다. 음... 조금 까칠하게 굴자면 모바일 말고 콘솔. 


그렇지만 카뮈가 말하는 실존이 무엇인지 감지할 수는 있다. 굶주린 짐승이 먹이를 잡아채는 것처럼 삶에 대한 맹렬하고도 동물적인 감각이라는 것을 나는 알아챈다. 한창 두뇌 활동이 왕성한 20대에 더듬거리며, 서툴게나마 『결혼』을 끝까지 원어로 읽었기 때문이다. 번역서의 문장들은 매끄럽고 아름답지만 내 것이 아니므로 관념적이고 피상적이다. 원어로 읽으면 다르다. 날것 그대로의 뜻을 곱씹게 되므로 구체적으로 내 것이 되어 손에 잡힌다. -50쪽
역사의 인간과 문학의 인간. 나는 종종 사람들을 두 부류로 나눈다. 실증의 세계인 역사와 허구의 세계인 문학은 필연적으로 충돌할 수밖에 없는데, 재미있는 것은 기질적으로 '역사의 인간'인 사람과 '문학의 인간'인 사람도 개와 고양이처럼 서로 잘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69쪽
인터넷의 발달로 누구나 구글링 몇 번만 거치면 미술에 대해 제법 이야기할 수 있는 시대가 왔지만, 나는 미술사를 전공한 사람의 강점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끊임없는 훈련을 통해 완전히 외워버려 자기 것이 된 이미지, '시대의 얼굴'이라 부를 수 있을 만큼 어떤 시대를 표상하는 이미지들에 대한 데이터가 체계적으로 뇌 속에 축적되어 있다는 것. 그 사실이 작품을 누리는 경험의 밀도를 향상시키고, 작품을 남에게 설명할 때의 깊이를 다르게 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른바 '주입식 교육'을 비판하며 창의적인 교육이 필요하다고 말하지만, 아직 뇌가 굳어버리기 전이라 외우는 일이 얼마든지 가능할 때 암기로 지식을 주입하는 일이 선행되지 않는다면 대체 무엇을 토양 삼아 창의성이라는 꽃이 자라날 수 있을까? '창의적'이라는 것은 여러 연구 끝에 합의된 기본적인 지식을 소화해 바닥을 잘 다진 다음 단계에서의 도약을 뜻하는 것이지, 허공으로 무작정 날아오르는 것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런 '창의성'은 영화 속에나 있다. -129~131쪽
책을 장악한다는 것은 날뛰는 야수의 목덜미를 낚아채어 도망가지 못하도록 틀어쥐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대학이라는 공간이 나를, 책이라는 맹수를 길들일 수 있도록 정교하게 훈련시켰다. -3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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