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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화 Mar 06. 2024

귀여운 녀석들의 대모험

모리미 도미히코, 유정천 가족 2


#본격보들보들액션     

...이라고 스스로 붙여놓았던 해시태그는 다시 봐도 웃긴다. (https://brunch.co.kr/@chitchat-books/47)


책 읽는 사람으로 살아온 **년을 돌이켜 볼 때 장르적으로건 시대적으로건 어떤 기준을 갖다 댄데도 그럭저럭 균형은 잡혔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는 독서 생활을 유지하려고 노력 중인데, 그럼에도 편애가 발동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란 종종 발생한다. 바로 이렇게, 좋아하는 작가의 신작이 나왔다던가 할 때. 이럴 때는 그냥 무한예찬모드가 발동되고 그건 누구도 막을 수 없고... 이하생략.     


모리미 도미히코는, 이미 어딘가에서 말했지만 (훗훗) 그의 책만 쭉 읽어왔어도 얼치기 교토 대학생 흉내는 낼 수 있을 정도로 교토를 배경으로 삼은 소설을 줄줄이 써냈는데 그 모두가 하나같이 놀라울 정도로 나의 유머코드와 몹시 일치해서, 그의 작품을 서점에서 발굴한 이래 오늘 좀 기분이 처진다, 싶은 날엔 늘 그의 책들을 다시 펼치면 즐거워졌고 힘내서 다시 열심히 살아보자는 의욕이 샘솟곤 했다. (전자의 경우엔 특히 「다다미 넉장 반 세계일주」가 그런 역할을 톡톡히 해주었고 후자는 「거룩한 게으름뱅이의 모험」에 힘입은 바가 컸다.      


“기숙사를 위스키 통 같은 거라고 생각하세요. 저는 자신을 숙성시키고 있는 겁니다. 맛이 깊어질 겁니다.”
“주인공이니까 노력해야 한다고 누가 정했어?”     


이런 대사를 읽으면서 위로받지 않을 게으름뱅이가 과연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이 말이 위안이 되지 않는다면 결단코 당신은 게으름뱅이가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게으름뱅이인가, 아닌가를 고찰해야 할 것 같지만 정신적으로는 정말로 위대한 게으름뱅이당의 열성 당원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머릿속에서만큼은 늘 한가롭게 방안을 데굴데굴 굴러다니고 있다. 온갖 망상의 늪에 들어갔다 나왔다 하면서, 헤벌쭉 헤벌쭉. 와, 쓰고 보니까 이건 좀 손절하고 싶은 인간슈레기 같네.     


여하간 작가는 너구리 애호가임에 틀림없고, 교토에서 자라지 않았으면 이토록 재미난 이야기들을 줄줄 써내기는 조금 힘들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고 보면 한 인간의 성장 환경은 이렇게나 중요한 거다.      


교토에는 너구리 가문이란 게 존재한다(소설을 다 읽고 나면 정말로 그런 게 존재할 것 같은 기묘한 확신이 생긴다). 너구리 세계에서도 평범(?)한 흙수저들이 태반이겠지만 너구리 일족을 호령하는 두령을 배출하기로 유명한 명문가라는 것도 엄연히 존재하여, 이 시리즈는 그 명문가의 형제들 중 삼남을 화자로 장대한 이야기를 풀어간다.      


시모가모 야사부로라는 이름의 이 너구리는 실로 밸도 없고 뭣도 없지만, 세상의 강자에게 아부하는 능력만큼은 출중하다. 본받고 싶을 정도다. 그리하여 그는 이미 은퇴하여 쇠락한 텐구에게도 주기적으로 문안 인사를 가는 한편, 그의 제자이자 재편되는 권력 구도에서 새로운 강자로 급부상하고 있는 미녀 벤텐에게도 열심히 줄을 댄다. 생존을 위하여 여기저기 손바닥을 부비며 쫓아다니기 바쁜 그 모습을 보노라면 그 성실함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한편으로 야사부로는 벤텐에게 반해 있기도 한데, 벤텐으로 말하자면 야사부로의 아버지를 전골 요리로 만들어버린 가문의 원수이기도 하지만, 말했듯 밸도 없는 우리의 야사부로는 그런 것쯤 괘념치 않는다. 이쯤 되면 이게 무슨 개막장 스토리인가 싶은데 이 모든 설정을 커버하는 작가의 플롯 짜는 솜씨는 신묘할 정도다. 모든 것을 납득하게 만든다...      


1편과 비교해 보면 너구리 액션의 스케일은 더 커진 것 같은데, 이야기의 조밀함은 1편이 조금 더 좋긴 했다. 그러나 작가 특유의 언어유희랄까, 친하지 않은 단어들을 나란히 짝지어놓고 상상초월의 케미를 터뜨리는 방식은 점점 더 빛을 발하여 포복절도하는 횟수와 강도는 점점 더 높아지더라. 3부작이라는 것도 이번에 2권이 나오면서 처음 알았는데 과연 이 너구리 가문의 이야기가 어떻게 종결을 맺을지 궁금하다.      


좌우지간 재미있게 살고 볼 일이다. 일단 그렇게 단정해보면 어떨까. 나는 현대 교토에 사는 너구리이지만, 일개 너구리라는 것을 긍지가 허하지 않아 먼발치에서 덴구를 동경하며 인간 흉내를 내는 것도 좋아해 마지않는다. 이 성가신 습성은 조상 대대로 면면히 전해 내려온 것이 틀림없다. 선친은 그것을 “바보의 피”라고 불렀다. -11쪽     
“그게 아니야, 야시로. 천재는 99퍼센트의 바보와 1퍼센트의 영감이라고.” 
“그럼 노력은 언제 하는데?” 
“…… 천명天命을 기다리는 것이다.” 
“그렇지만 형, 난 그럼 안 될 것 같은데.” -23쪽     
“거럼. 난 언제 어느 때나 유쾌하지. (...) 나한테는 삼라만상이 엔터테인먼트거든.” -149쪽 
온천은 적과 아군을 가리지 않고 우리 모두를 뭉근하게 끓여주는 전골이다. -299쪽     
입은 험한데 하는 말은 본질적인 부분을 건드리니 더 화난다. 같은 말을 하려도 좀 더 보들보들한 너구리적 커뮤니케이션이 있지 않나. -376쪽     


이 정도의 인용으로도 작가의 텐션(...)을 읽기에 모자람이 없다. 아마도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릴 터다. 좋아하는 사람은 물개박수를 치면서 좋아할 테고, 미간을 찌푸릴 사람은 그러니까 작가가 도대체 쓰고 싶은 건 뭐야, 하게 될 테고. 무엇이면 어떤가. 독서란 무릇 나름의 즐거움을 탐색하는 행위 아닌가! 나 역시도 가끔은 진지하게 개론과 평론을 읽고, 눈물 찔끔거리면서 신파를 읽고, 머리를 쥐어뜯으면서 이론 공부를 한다. 뒤처질까 봐 신간 부지런히 읽고, 그러다 카카페나 리디를 열어 보다 만 웹소설을 읽기도 하고(ㄱㅇㅈㅅ보세요! 대존잼...). 그 모두가 각각의 재미와 의미가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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