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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화 Mar 11. 2024

그들의 내밀한 삶이 건반에 맞닿아

프랑수아 누델만, 건반 위의 철학자

집착, 미련.

어떤 것에 늘 마음이 쏠려 잊지 못하고 매달림. 이것은 집착을 뜻풀이한 것이고, 깨끗이 잊지 못하고 끌리는 데가 남아있는 마음, 이것은 미련을 찾아보면 나오는 뜻이다. 브리야 사바랭 이후 당신이 무엇무엇 목적어를 어떻게저떻게 동사함을 말해주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말해주겠다, 하는 말들이 엄청나게 폭증했다. 나는 그것을 약간 비틀어서, 우리가 늘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집착하는 것이 무엇인지가 우리 자신에 대해 제법 많은 것을 알려준다고 말하고 싶다.      


완전히 못 가졌다고도 할 수 없고 늘 곁에 두고 지켜보고 있다고도 말할 수 없는 것들은 많지만 그중의 하나가 피아노(연주 실력)다. 피아노를 안 치는 것은 아니지만, 칠 수 없는 상황들이 연달아 발생하는 바람에 피아노가 놀고 있다. 우리 집에는 다섯 명의 인구가 있고, 이중 나를 포함한 세 명이 피아노를 연주할 수 있는 사람들인데, 피아노에 순전한 애정만이 있는 사람이 나이고, 애증 쪽에서 애가 80% 정도를 차지하는 이가 하나, 애<증이었으나 자발적으로 애=증을 거쳐 애>증으로 넘어오고 있는 이가 하나다. 자매가 어릴 적부터 나는 이 아이들이 절대로 피아노를 미워하지 않기를, 부디 오래오래 이 친구와 사이좋게 지내기를 바랐다. 


그렇다면 왜 나는 그토록 피아노에 집착하는가. 글쎄, 글로 쓰려니 어렵긴 한데 아마 그것은 소리로 ‘공명’하는 그 느낌에 압도되었던 최초의 경험 탓이 아닌가 싶다. 한낱 하찮은 아마추어 애호가지만, 내게 피아노란 단 한 소절만을 연주할 수 있어도 그 한 소절로 마음이 통했다고 느끼게끔 해주는 친구이고 가족인 탓에.      

아마도 그것이 내가 피아노가 소재가 된 책들은 그게 뭐가 됐건 절대로 지나치지 못하는 이유일 거라고 변명을 우선 붙여둔다.     


건반 위의 철학자 | 저자 프랑수아 누델만 | 출판 시간의흐름 | 발매 2021.02.12.



저자는 철학을 가르치는 교수이자 아마추어 피아니스트이다. 그는 어느 날 문득 무엇인가를 발견한다. 새로운 형식을 선도한 음악가들을 지지하고 절찬해 온 저명한 철학자들이 개인적으로는 아마추어 피아니스트이기도 했으며, 신기하게도 그들이 공식적으로 말해온 바와는 별개로 낭만주의 작곡가들, 구체적으로는 쇼팽과 슈만-을 몹시도 사랑하여 즐겨 연주했다는 사실을 말이다. 흥미로운 불일치 아닌가.     


내가 놀랐던 것은 그의 피아노 연주가 들려주는 생경한 리듬이었다. 그 리듬은 우리가 사르트르의 대중 강연이나 참여문학적 글쓰기에서 익히 접하던 것과는 확연히 달랐다. -10쪽    

 

이 세 명은 당대의 가장 현대적인 음악을 논했지만 정작 이들이 사랑했던 음악은 피아노가 악기로서 전성기를 누렸던 낭만주의 시대의 음악이었다. 일부 성미 급한 비평가들은 음악 취향에 대해 이들이 보인 모순된 태도가 자신들의 모던하지 못한 음악 취향을 대중 앞에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하지만 이 부조화는 단순히 겉으로 드러난 모순보다 훨씬 많은 것을 말해준다. 그 안에는 어떤 비밀스러운 것, 이들이 타협하고 있거나 유예시키고 있는 무언가가 담겨 있다. 그것은 이 세 철학자는 물론 우리 자신의 또 다른 얼굴일 것이다. -12쪽     


어떻게 된 영문이기에 그들은 앞뒤가 맞지 않는 행동을 했는지 궁금해진 저자는 그들의 사적인 삶을 파헤쳐 본다. 그들에게 피아노가 상징하는 바가 무엇이었으며, 피아노를 연주하는 행위가 그들에게 의미하는 바는 무엇이었는지. 당대의 음악가들과 교류하면서 추구한 것이 무엇이었고, 그들에게 피아노가 단순히 어떤 ‘재현’을 넘어서서 무엇의 ‘구현’이었는지도. 그들의 피아니즘과 아마추어리즘이 만난 곳에서 태어난 것이 무엇이었는지까지.      


그 철학자들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 

장 폴 사르트르, 프리드리히 니체, 롤랑 바르트.     


하지만 사르트르는 프로페셔널 피아니스트가 되어 음악적 해석과 작곡에 헌신하는 삶을 꿈꿨다. 어렸을 때부터 연주해온 레퍼토리에도 불구하고 사르트르는 자신을 클래식 연주자로 여기지 않았다. 그는 철학자 사르트르 혹은 작가 사르트르가 아닌, 재즈 피아니스트 사르트르가 되길 언제나 소망했다. -59쪽     
“음악은 노래해야 한다.” 니체는 이 명제를 생리적 요구이자 철학적 무기로 받아들였고 끝까지 고수했다. 그렇다면 니체에게 이런 신념을 새겨넣은 작곡가는 누구였을까? -80쪽     
클로드 모포메는 오프닝 멘트로 바르트에게 슈만을 어떻게 듣는지 물었다. 바르트는 이렇게 답했다. 
슈만을 어떻게 듣냐고요?
(…)
나 자신도 모르는 나의 어떤 부분, 정확히 그 부분이 내가 슈만을 사랑하는 이유니까요. -175쪽     


그가 무엇을 좋아하거나 어떤 것을 소유했거나, 혹은 무엇에 미련을 갖고 있는지만으로 한 사람의 윤곽을 그려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만이고 언어도단이다. 하지만 그러한 단서들을 그 누군가에겐 이런 일면도 있었다, 라고 이해하는 것은 인간이란 본래 다면적 존재임을 전제하는 것이니 괜찮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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