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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화 Mar 25. 2024

취향의 역사, 서브컬처 간이역

마이너 리뷰 갤러리, 오타쿠의 욕망을 읽다

신간 페이지를 쭉쭉 넘기다가 이 어마어마한 제목의 책을 발견하고 나는 (가슴에 손을 얹고 맹세컨대) 5초간 얼어붙어 있었다. 뭐지, 나는 아래로 스크롤을 내리고 싶었을 뿐인데 왜 손은 상세보기를 누르고 있는 거지. 망할 오타쿠의 피(그리고 그 짙은 핏줄은 고딩 주니어에게로 이어져, ‘나는 우리 엄마가 오타쿠인게 너무 좋아, 내가 돈 하나도 안 써도 집에 보고 싶은 게 자동으로 공급되잖아’라는 망발을 내뱉기에 이른다. 웃겨. 내 책에 손대지 마. 프리렌 도로 내놔 이 자식아) 같으니라고.     



오타쿠의 욕망을 읽다 | 저자 마이너 리뷰 갤러리 | 출판 메디치미디어 | 발매 2024.03.04.


부제는 <다음 트렌드를 주도하는 사람들>이라고 붙어 있는데, 우와 이 패기. 근사하군요. 역시 사람은 패기로 승부를 봐야죠. 멋집니다. 그러고 보니 나는 언제부터 이 마이너 일족의 일원이 되었던가. 기억나지 않는 걸 보면 꽤나 유구한 역사의 한 페이지에 어딘가 낑겨가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착각마저 든다.      

이 책은 일명 서브컬처, 톡 까놓고 말해 오타쿠 문화의 태동부터 활황기를 거쳐 어쩐지 각자의 분파로 갈라져가고 있는(제 느낌일 뿐입니다…)시기를 대표할 만한 작품들을 아우르고 있다. 


책을 읽는 내내 맞다, 맞아, 이런 것도 있었는데, 하고 기억을 더듬어가며 지금의 나, 라는 어떤 문화 유전자를 구성하는 인자를 주입했던 작품들을 다시금 톺아보는 건 꽤 즐거웠다. 추억을 돌이켜보는 차원에서나 내가 어떤 작품에서 어떤 성향을 흡수했는지를 짚어보는 일종의 시간여행 같은 느낌. 오래전 얘기지만 하루 24시간 중 1/3을 상주하다시피 했던 ANC도 기억나고(여기서 제작했던 카드캡터 사쿠라 전화카드는 꽤 최근까지도 갖고 있었지만…)     


코로나 시대가 지나면서 대중문화는 이런 ‘동조압력’에 의한 소구점을 많이 잃어버렸습니다. OTT와 유튜브 같은 대안적 매체의 발달로 인해 사람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만 찾아볼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대중문화의 해체기를 겪고 있을지 모릅니다. 한때는 대중문화가 교묘하게 프롤레타리아를 지배한다고 했지만 이젠 대중문화는 프롤레타리아는커녕, 특정 세대나 특정 성별조차 지배하지 못합니다. -43쪽     


어찌 보면 당연한 이야기지만, 문화도 파편화되어가고 있으니까. 불과 10년 전에만 해도 가능했던 시청률이, 요즘은 제법 인기몰이를 했다는 말이 도는 드라마라고 해도 넘보기 쉽지 않지 않은가. 그 정도로 취향은 세분화되었고 모든 사람들에게 대중적으로 호소력 있는 소재나 전개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게 되었으니까. 창작자 입장에서는, 글쎄. 그 정도로 취향이 세분화되었다고 하면 좋은 것일까, 좋지 않은 것일까. 

그런데 이게 꼭 맞는 말은 아닌 것이 전세계적으로 히트를 친 작품은 또 계속해서 나오니까, 결국은 이것도 맞고 저것도 맞는다는 애매한 결론이 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사람들이 모두 좋아하는 소재나 전개는 존재하지 않을지 몰라도, 대중적으로 호소력이 있는 ‘감수성’은 분명히 존재한다. 최근 몇 달간의 폭룡적 인풋(내 시력…)의 결론이다.      


은혼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이제 하나의 작품은 하나의 타깃을 대상으로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물론 타깃층을 정확히 잡는 것이 더 편하고 유리한 일이지만 작금의 소비자들은 자신이 원하는 부분만 골라서 소비합니다. 같은 은혼을 보더라도 남성층은 매력적인 대체역사물과 개그 소년만화의 성장에 주목하는 반면 여성층은 캐릭터성과 관계도를 주목하여 소비합니다. -253쪽     


이 대목을 읽고 나는 지인 중 한 사람을 떠올리며 폭소할 수밖에 없었다. 겉보기엔 그야말로 조신 차분하며, 목소리도 사근사근하고 첫만남에서 사람들로 하여금 ‘좀 가깝게 지내고 싶다’라는 분위기를 자아내는 이가 있다. 나도 처음엔 그런 줄 알았다. -_-;;; 

몇 년간 가깝게 지내다 보니 서로 별별 취향을 다 알게 되는 사이가 되었는데, 나는 지금도 몇 년 전 그녀가 내게 몰래 고백한 취향을 잊을 수가 없다.      


“언니, 이나중 탁구부 알아?”     


그 말을 하던 지인의 반짝반짝한 눈망울을…

음, 그 시선을 박제해서 그 댁 남편분께 선물로 보내드리고 싶었다. 이 선생님, 부인께서 이런 눈빛도 하실 수 있는 거, 혹시 알고 계십니까, 하고.      


아니 그전에 왜 때문에 나를 이나중 탁구부를 당연히 알 거라고 생각한 거냐고. 

왜, 도대체 왜 진짜 너무 재밌지만 차마 이걸 좋아한다고 남한테 말하는 게 너무 부끄러워서 아무한테도 말하지 못했던 비밀이라면서 나한테 말하는데!!!!!!!!!!!!!     


근데 나는 왜 아는데!!!!!!!!


순진무구하게 아니 몰라, 그게 뭔데? 하고 싶었는데, 먼저 푸핫 터져버린 이놈의 주댕이.

이건 다 내 남동생 탓이다. 암 그렇고말고. 

동생 방에서 「신의 물방울」, 「리니지」만 갖다 보는 선에서 끝냈어야 했는데. 아니, 「멋지다 마사루」로 끝낼걸.


항상 진지하게 책리뷰 쓰는 일에 임해왔는데, 오늘은 어쩐지 스스로 늪으로 걸어들어간 기분이다. 하지만 뭐, 사는 게 다 그런 거니까.

인생 망…

이미지 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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