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정원
나를 오래된 정원이라 불러준 그에게 부쳐.
도저히 어찌해야 할지 모르는 마음만 남아 있었다.
2005년 4월이 되었을 때의 나는 23살이었고 휴학 신청을 하고 느닷없이 가출을 해서는 해인사에 일주일을 머물렀다. 2010년 늦가을 무작정 서울로 이주했을 때의 나는 부모님께 취직이 되었다 거짓말했다. 2018년 2월에는 믿기지 않게 느껴졌던 퇴사를 진짜 했다. 그리고 2022년 4월 현재, 결혼 4년 차이자 한 아이의 엄마로 3년 차다. 이제는 시간의 흐름 가운데 어느 한순간으로 돌아가 세세한 사정을 고백하는 일이 조금은 고단해졌다. 어느 시인의 글처럼 '시간을 발밑에 묻고 있는 꽃나무처럼' 나도 그저 묻어두려 한다. 다만 그 순간마다 도저히 어찌해야 할지 모르는 내 마음만 남아있었고 그 마음이 나를 어떻게든 부려서 때마다 탈출구를 찾게 했다. 알 수 없는 인생이지만 다행히도 가족이 나를 지켜주고 있고 감사하게도 엄마라는 끝없는 직업까지 갖게 되었다. 매번 끝 간데없는 텅 빈 공간에서 홀로 시간을 보냈고 나는 그저 뚜벅뚜벅 걸었다.
어리고 약했던 여러 모습의 나를 바라보는 건 23살이었던 그때도, 39살인 지금도 여전히 힘에 부친다. 20대에는 얼른 마흔이 되고 싶었는데, 웃기지만 그즈음 되면 큰 고민 없이 살 수 있을 줄 알았다. 몇 번 시도해 보았지만 결국엔 잘 되지 않았다. 고백하고 다짐하는 일이 무척 고됐다. 그래서 혹시나 아주 가끔 그때의 내가 궁금할 때 '그 꽃나무'에 그저 기대어만 볼 수 있다면 좋겠다.
나를 '오래된 정원'이라 칭해준 사람이 있었다. 내가 오래된 정원처럼 보여졌는지 아니면 그러길 바라는 마음이었는지, 그리고 그 사람이 말한 '오래된 정원'이 나는 무엇을 말하는지 지금도 알 수 없다. 겸연쩍어 물어보지 않았고 피식 웃으며 넘겼고 간혹 부담스럽기도 했다. 그 사람은 꽤 오래 나를 주변인들에게 '오래원 정원'이라 소개했다. 시간이 흘러 문득 그 오래된 정원이 떠올랐다. 눈을 감고 머릿속으로 아주 천천히 그려 보았다. 그저 따듯한 것들, 쉽게 부식되지 않는 것들, 때론 낡고 희미해진 것들, 수많은 이야기들이 존재하지만 새로운 건 없다. 원래 있었던 것들이 시간만 입은 채 그저 그대로 존재하는 형태이지 않을까. 길을 가다 그러한 오래된 정원이 보인다면 편안한 마음으로 들어가 볼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받는 쪽보다 주는 쪽이 좋다. 친구를 사귈 때도 사랑하는 사람을 대할 때도 늘 주는 쪽을 좋았다. 지금도 받길 기대하기보다는 작은 것들을 자주 주고 싶어 한다. 꼭 물질이 아니어도 나의 품, 표정, 목소리, 마음들을 내어주고 상대가 편안해하면 그 에너지로 나는 채워진다. 그걸로 충분하다. 누군가를 만나서 그 사람에게 집중하면 내 에너지가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가 있었다. 많은 사람을 만나진 못했지만 잠시 인연을 맺었던 사람들에게 나는 꽤나 영향을 많이 받는 사람이었고, 현재 내 곁에 누가 존재하는 지로 인해 내 모습이 달라졌다.
그런 나의 보이지 않는 내적인 모습과 둥글고 편안하게 풍기는 외적인 모습이 오래된 정원에 가깝다면, 그렇게 나를 소개해 주어도 반갑게 받아들일 수 있겠다.
나는 여전히 나로 지내고 있다. 많은 것들을 분명하지 않게 내버려 둔 채 감정의 진폭을 느끼며 살아간다. 엄마로 지내다가 어찌해도 답답한 날에는 20대의 내가 현관문을 박차고 나가 무작정 걷더라. 처음엔 나도 놀랬다. 그 뒤로도 몇 번 더 그랬다. 남편과 싸우고 그 불씨가 아이에게 튈까 무서워 목 끝까지 차오른 울음을 다시 삼키어 내고 찾아간 곳은 여전히 도서관이었다. 크게 하고 싶은 것도 할 수 있는 것도 없는 나는 여전히 나였다.
여전히 나인채로 어떤 새로움을 갈구하기보단, 현재의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로 다시 채워보고 싶다. 아주 천천히 느리게 혹은 되돌아가 줍기도 하면서. 여기 오래된 정원이 있으니 여유가 찾아드는 날에 잠시, 혹은 오래 머물다 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