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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 여정

by Bridge K

대학 입시에 세 곳을 지원했고, 운 좋게도 세 군데 모두 합격했다. 하지만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내가 가장 가고 싶었던 곳이 아닌, 집에서 가장 가까운 학교를 선택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실망스러웠지만, 오리엔테이션 때 한 교수님의 말씀이 조금은 마음을 다잡게 해주었다.


“비록 우리대학이 비록 지방에 있지만, 여러분의 시야는 세계를 향해야 합니다.”

그 말을 들으며 순간 다짐했다. ‘그래, 학교 위치가 뭐가 중요해. 나만 열심히 하면 돼.’
그런 생각을 할 정도면 철이 좀 들었어야 했는데, 지금 돌아보면 그저 어렸다.


나는 ‘라떼는 말이야~’ 하고 잔소리할 수 있을 만한 선배는 아니다. 10대를 막 벗어난 20대 초반의 나는 상당히 미숙했고, 세상 물정도 잘 몰랐으며, 멘탈도 그리 강하지 않았다. 힘든 일이 닥치면 무릇 용기를 내 싸우기 보다는 버티는 쪽을 택했다. 시간이 지나가기를 바랐기도 하다. 그나마 '뒤처지면 안 된다'는 막연한 강박감이 나를 붙잡아주었다. 조직 안에서 아주 뒤처지는 사람으로는 남지 않게 해줬으니, 어쩌면 이 험한 세상에서의 최후의 생존 기술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온 힘을 짜내며 버티기로 살아가고 있는 중이기도 하다보니 누군가에게 모범이 될만한 위인은 못된다.



대학교 3학년 2학기에서 4학년 1학기 사이, 운 좋게도 일찌감치 취업이 확정됐다. 선망하던 회사였고, 여유와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자신감은 오래가지 못했다. 입사 후 지원한 신규사업팀은 2년 만에 해체되었고, 나는 예상치 못한 부서로 옮겨졌다. 그곳은 인사팀이었다. 이공계 출신 선배들도 더러 있었고, 적성에도 잘 맞았지만 오래 근무하진 못했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세 번째 부서에 가게 되었고, 그곳에서는 비교적 오래 근무했다. 회사와 정도 들었고, 이 도시도 어느덧 고향처럼 느껴졌다. 아내를 만나 결혼했고, 아이도 태어났다. 회사를 떠난 이유는 미움이나 불만이 아니라, 새로운 삶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퇴사 후, 새로운 도전을 준비하며 공기업 채용에 지원했다. 홈플러스 지하 주차장에서 발표를 기다리던 순간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날 나는 합격자 명단에서 내 이름을 확인했고, 첫 직장에 합격했을 때보다 더 크게 기뻐했던 것 같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직장은 두 달도 채 다니지 못했다. 업계 특성에 따른 경력자 추천이라는 명분은 있었지만, 결국 또 다른 회사를 선택한 건 나였다. 그리고 다시 한번 선택의 무게를 느꼈다. 책임이 따르는 어른의 삶에서는 말과 행동이 결국 삶의 궤적을 만든다는 사실을.


이번 여정은 정규직이 아닌 계약직, 그것도 소사장제로 참여하는 프리랜서 형태였다. 인생에서 첫 사업자등록증을 발급받았고, 2년여의 계약기간이 긴장감을 주어 중간에 무인 빨래방도 열었다. 미래가 불안했기 때문이다. 이 또한 언젠가 이야기할 수 있는 나만의 경험이 되었다. 정해진 기간이 흐르고 홀로 서야 할 시점이 왔다. 무주공산 같은 현실, 쉬는 건 잠깐이었다. 가족과 나를 위해 다시 무언가를 해야 했다. 그렇게 두 번째, 아니 세 번째 사업자등록증을 냈다. 코로나 시기였고, 재택 기반의 취업 컨설팅을 시작했다. 동네 학원 강사로도 일했다. 살기 위해 무던히 애썼다.


지금은 철강 제조 중견기업에서 일하고 있다. 지인의 추천으로 경력직으로 입사했지만, 기존에 경력직이 거의 없던 회사라 나라는 존재는 어색한 존재였을지도 모른다. 역시 어른의 세계는 냉정하며 무거웠고, 적응과 성과는 온전히 내 몫이었다.




가끔 내 브랜드에 대해 생각해 본다. 독특하거나 눈에 띄는 커리어는 아니지만, 조금은 남다른 여정이 이 삶에 있다. 그 여정의 바탕엔 더 나은 삶에 대한 기대와 행동이 있었다. 반드시 옳은 선택은 아니었고, 매 순간이 생기발랄한 모습도 아니었다. 하지만 나만의 속도로 꾸준히 걸어왔다. 그렇게 나는 점차 어른의 길을 걷고 있고, 그 시간을 통과하며 천천히 익어가고 있다. 그래서일까. 나의 브랜드도 조금씩 쌓여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오늘도 최선을 다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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