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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의 형태가 다르면, 일도 삶도 달라진다

207년의 조직 경험에서 얻은 실무자의 솔직한 통찰

by Bridge K

그간 몸담았던 회사들의 역사를 모두 더해보니 무려 207년에 달했다. 이미 멈춘 시간도 있고, 여전히 흐르고 있는 시간도 있다. 감히 상상조차 어려운 이 시간은 대학 졸업 후 인연을 맺은 회사들의 역사를 겹겹이 쌓아 올린 숫자다.

개항 이전 상업 발전이 더디었던 우리나라에서는 100년 넘는 기업조차 드물다. 그런 점에서 207년이라는 숫자는 결코 평범하지 않다. 대기업, 공기업, 외국계 기업, 그리고 지금 재직 중인 중견기업까지—나는 다양한 형태의 회사를 경험하며 이 숫자를 쌓아왔다.


이번 글에서는 각기 다른 형태의 회사에서 일하며 느꼈던 점들을 나눠보고자 한다. 아쉽게도 ‘어떻게 입사했는가’에 관한 이야기는 아니다. 그보다는 시장에서의 회사 형태별 조직의 성격에 대한 짧은 이야기다.

물론, 단순한 나만의 경험이 보편성을 갖는 것은 아니다. 개개인의 감정과 상황이 다르기에 경험을 일반화하긴 어렵다. 단 한 군데씩 밖에 경험하지 않는 기업들도 각 기업 형태를 대표하지 않는다. 하지만 가능한 한 솔직하고 중립적인 마음으로 이야기해보려 한다.




대기업: 보이지 않는 거대한 사회

대기업은 그 자체로 하나의 작은 사회 와도 같다. 직원 수만 해도 수천 명에서 수만 혹은 수십만 명에 이르니, 회사 안에서 모르는 사람이 훨씬 더 많은 조직이다. 심지어 같은 날 입사해 합숙 교육을 받으며 전우애 이상의 애틋한 정을 나눈 동기들조차 각기 다른 사업부나 지역으로 흩어진 뒤엔 점점 멀어지게 된다. 결국 함께 프로젝트를 하지 않는 이상 오다가다 마주쳐도 ‘다른 회사 사람’처럼 느껴지곤 한다.

일반적으로 대기업은 자산 규모 5조 원 이상인 집단을 말한다. 이 정도 자산을 운용하려면 사업 포트폴리오도 방대해질 수밖에 없다. HR, 공급망, 스케줄, 마케팅, 재무 등 대부분의 기능이 고도화되지 않으면 경쟁에서 밀리거나 서서히 무너질 수도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대기업은 조직의 시스템과 업무 분장정교하게 구성돼 있다는 또 다른 특징을 가진다. 역할은 비교적 명확하고, 효율성과 일관성을 중시하는 의사결정 체계가 작동한다. 덕분에 혼란은 적지만, 그만큼 개인이 감당하는 일의 스펙트럼은 좁다. 퍼즐의 한 조각처럼 나의 역할은 분명하지만, 전체 그림은 잘 보이지 않는 구조다.

그리고 대기업을 떠난 뒤에야 비로소 느끼게 된 작지만 묘한 감정이 있다. 바로 ‘명함의 무게’다. 조직 안에서는 특별하지 않았던 이름 석 자가, 바깥에서는 적지 않은 상징으로 받아들여지곤 한다. 내가 누구인지 말하지 않아도, 명함이 먼저 말해주는 것 같은 느낌. 지금 와서야 그게 얼마나 큰 프라이드였는지, 자주 깨닫게 된다.


글로벌 조직문화의 공통점과 차이점

외국계 기업에서의 경험은 일본계 엔지니어링 회사였다. 나는 그곳에서 2년 조금 넘게 계약직으로 근무했다. 일본 대기업이라는 특성 덕분에 전체적인 분위기나 기업 문화는 국내 대기업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업무는 역시나 세밀하게 분업화되어 있었고, 보고 체계 또한 명확했다. 실무자, 팀장급 중간관리자, Director급 관리자, 그리고 임원급 의사결정자로 이어지는 수직적인 체계는 내가 이전에 함께 근무한 경험이 있던 서구권 글로벌 기업들과도 유사했다. 책임과 권한이 분명하게 구분되고, 보고의 경로가 명확하다는 점과 조직도 면에서는 공통점이 많았다. 우리 기업들이 해외 사례를 참고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성과주의 문화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잘한 부분은 적극적으로 칭찬하고, 부족하거나 개선이 필요한 점, 혹은 조직문화를 해치는 행동(예: 부정행위, 안전 관련 지침 위반 등)에 대해서는 명확히 주의를 주거나 조치를 취했다. 조직을 운영하는 기본 원칙은 국적을 불문하고 유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일본 기업 특유의 문화도 있었다. 업무 혹은 식사 시간 등 전반적으로 조용한 분위기나, 각자의 일을 대하는 태도 등은 한국 회사의 분위기와는 다른 점이라고 느껴졌다.

나의 계약은 한국내에서의 프로젝트 종료 시점에 맞춰 해지되었다. 추가 계약 연장 가능성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당시 코로나 시즌인 특수성으로 인한 어려움도 느껴졌다. 이 부분은 비단 개인적으로 국한된 점은 아니었다. 외국계 기업 특성상 해외 진출뿐만 아니라 거점 철수 역시 (대규모 공장 등의 투자가 아니라면) 본사의 다양한 요인에 의해 결정된다.



중견기업 – 사람과 일의 거리가 가까운 곳

중견기업의 특징 중 하나는 조직 규모에서 비롯되는 인간관계의 밀도다. 대기업이 다양한 외부 접점을 통해 관계의 폭을 넓힌다면, 중견기업은 조직 내부에서 더 가깝고 촘촘한 관계망이 형성된다. 수십 명에서 수백 명 규모의 조직에서는 이름과 얼굴을 아는 동료가 많고, 부서를 넘어선 협업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업무 구조 역시 대기업과는 다르다. 역할이 비교적 넓고 유연하다. 인력 풀이 크지 않다 보니 개인이 맡는 업무의 범위가 넓어지고, 자연스레 여러 기능을 익히며 전문성을 쌓게 된다. 덕분에 일찍부터 조직 전체를 조망하고 판단력을 기를 수 있는 기회도 많다. 예컨대, 주니어 시절부터 CEO의 직접 지시를 받고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일은 중견기업에서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이러한 구조는 젊은 직원이 전략 수립이나 기획 단계에 참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준다. 이는 개인에게는 빠른 성장의 기회이고, 기업 입장에서는 유연하고 민첩한 조직 운영을 가능케 한다.

또 하나의 차이는 사업 아이템의 영역이다. 대체로 대기업은 자본과 인력을 바탕으로 중소·중견기업이 접근 하기 힘든 분야가 많다. 정유, 반도체, 전자, 조선, 방산 그리고 제약, 식품 등 대체로 집적된 대규모 프로세스와 단일화된 브랜드 매니지먼트가 필요한 경우가 많다.

따라서 중견기업은 대기업의 관심에서 비켜 있고, 중소기업은 도전하기 어려운 분야를 맡는 경우가 많다. 중간 이상의 설비 투자가 가능하거나, 오랜 노하우로 관리되는 기술을 보유한 기업들이 이에 해당한다. 또는 오랜 기간동안 대기업의 파트너로서 성장한 중견기업도 해당된다. 어찌 보면, 중견기업은 두 세계 사이의 독특한 균형점에 놓여 있다. 대기업처럼 거대하지 않지만, 스타트업 혹은 중소기업처럼 가볍지도 않은. 그래서 더 단단하고 유연한 가능성을 품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디서 일할 것인가보다, 어떻게 일할 것인가

일자리는 개인의 꿈과 목표를 실현하는 무대인 동시에, 일상을 유지하게 해주는 삶의 터전이다. 하지만 우리는 여러 일자리를 동시에 선택할 수 없다. 결국 자신의 성향과 역량을 기준으로 선택지를 좁혀야 한다.

어떤 일자리는 많은 이들이 선망하는 만큼 높은 경쟁률을 뚫어야 하며, 또 어떤 일자리는 비교적 구체적인 경력이나 조건을 갖춘 이들에게만 열려 있다. 그렇기에 ‘어떤 기업에 들어갈 것인가’ 뿐 아니라, ‘어떤 형태의 기업이 나와 맞을까’를 고민해 보는 것도 중요하다.

예를 들어, 대기업은 풍부한 복지와 소속감, 그리고 비교적 높은 임금이 강점이다. 하지만 그만큼 넓은 경영 시야를 확보하려면 오랜 시간과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반면, 중견기업은 비교적 빠른 시기에 전략 기획이나 회사의 운영 방향 설정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외국계 기업은 합리적인 인사 시스템과 성과 중심의 문화가 매력적이지만, 한국 내 비즈니스 지속 여부에 따라 고용 안정성이 영향을 받을 수 있다.

2024년 기준, 우리나라 경제활동 인구 중 자산 5조 원 이상의 대기업에 속해 있는 사람은 약 187만 명, 전체의 약 6~7%에 불과하다. 모두가 같은 환경에서 일할 수 없다면, 각기 다른 기업 형태의 장점을 발견하고 활용하는 자세도 필요하지 않을까. 직장은 단지 입사의 결과가 아니라, 삶의 방식이자 성장의 배경이 되기도 한다. 그러니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어디에 들어갔는가’보다 ‘어떻게 일하며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자기만의 기준을 세우는 일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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