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살 대변인의 발기부전 투병기
2015년 3월, 지금 일하는 피자집을 열기 전까지
약 2년 동안 나는 백수였다.
그땐 내가 결혼을 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아니 못했다.
아르헨티나에 이민 간다고 날뛰기도 했고 TV 방송의 뒷배경으로 등장하곤 했다.
요약하자면 쓸데없이 싸돌아 다녔다.(뉴욕 타임스퀘어 뽀로로 인형속 사람도 본인)
연애에 있어서도 과연 어떤 여자가 나를 평생 감당할 수 있겠냐며
자유연애의 기치를 높게 들었었다.
물론 '자유연애'의 자유는
많은 여자를 만나는 '자유'일 수도,
못 만나서 '자유'일 수도 있다.
내가 어느 쪽이었는지는 상상에 맡긴다.
대한민국이 광복 70주년을 맞이하고
우편번호를 기존 6자리에 5자리로 변경한 2015년
나에게도 많은 일이 있었다.
그해 3월
우연히, 생각지도 않게, 어쩌다, 왜 그랬을까?
피자집을 열었다.
한 달 앞선 2월, 역시
우연히, 생각지도 않게, 어쩌다, 왜 그랬을까?
그녀를 만났다.
그리고...... 6개월 후
나는 결혼했다.
이 여자라면 평생 같이 살 수 있겠다는 믿음이 들었다.
지금도 그 믿음엔 변함이 없다.
달라진 것은 단 하나.
생물학적 요도로 전락해버린 내 매직스틱
2015년 8월 나는 그녀와 부부의 연을 맺었다.
집사람은 오랜 타지 생활과 약간의 허튼짓으로,
나는 오랜 방황과 많은 허튼짓으로
둘 다 모아놓은 돈이 없어 저비용 결혼식을 했다.
신혼집은 분가분가 못하고 부모님 집에 얹혀사는 캥거루 부부가 되었다.
그렇게 자유인은 가장이 되었다.
남편, 가장이라는 수식어가 내 앞에 붙었다
OO피자 OOO점 사장이라는 수식어도 함께였다.
그렇다.
나는 피자 가게를 운영해서
부부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가장이다.
하지만 가게는 오픈하고 6개월간 수익이 없었다.
매일 12시간씩 고된 노동에도 소득이 없다는 것은 엄청난 스트레스였다.
결국 아르바이트 친구들을 정리하고 혼자 매장을 운영하고
배달은 대행업체를 이용하는 1인 매장으로 운영을 변경했다.
이즘 지난 35년간 내 곁에서 왕성한 활동을 보여주던 '성욕'이라는 친구도 함께 정리되었다.
하루 종일 서서 일하고 들어오면 휴식이 먼저였다.
육체적, 정신적으로 너무 힘들어 쉬고 싶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하지만 집에서는 빨리 2세를 바라고 있었다.
보통 다른 신혼부부는 그러한 부모님의 바람을 전화를 통해 듣지만
우리는 약 4~5미터 떨어진 거리에서 들어야 했다.
지금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무리해서라도 분가분가 했을것 같다.
결론은 빨리 아이를 만들어야만 했다.
마치 새끼를 만들어야 하는 종마의 그것처럼.
4-5미터 넘어의 부모님을 의식하며
해야만 했다.
하지만 나의 매직스틱은 반응하지 않았다.
당황했다.
집사람과 함께 우주의 기운을 모으려 했지만
모일듯 모일듯 하면서도 쉽게 모이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 부부는 잠시 밖으로 나왔다.
대실 25,000원
하지만 그곳에서도 대답 없는 그곳을 보며
이제는 위기감을 넘어 자괴감이 몰려왔다.
"내가 고자라니"
더 이상 육체적, 정신적 충격이 계속되면 내 장래와 결혼의 미래도 문제가 생길 것 같아
집사람에게 말했다.
여보 나, 병원 갔다 올게...
<하편에 계속...>
https://brunch.co.kr/@briefing/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