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 찾아온 쉼표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빈 킥보드를 끌며 집으로 돌아온다. 아이가 원하는 대로 킥보드를 타고 어린이집에 등원을 시켜줄 수 있다는 사실에 어색함이 밀려온다. 보통의 워킹맘들이 그러하듯 매일 아침 감은 머리를 다 말리지 못한 채 축축한 머리를 대충 동여 묶고 아직 아이에게는 이른 시간에 곤히 잠든 아이 곁으로 간다. 아침 햇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쌔근쌔근 잠든 아이의 모습은 깨우기에 안쓰러울 정도이다. 불편한 마음을 가득 안은 채 일어날 시간이라며 아이의 엉덩이를 토닥여 보지만 아이는 쉽사리 일어나지 않는다. 결국 양치도 하지 못한 내복 차림의 아이를 카시트에 겨우 태워 친정집에 아이를 던져놓듯 맡기고 회사를 향해 운전대를 잡는다. 날씨가 따듯한 계절은 그나마 양반이다. 찬바람이라도 불기 시작하면 카시트가 차갑다며 칭얼거리는 아이를 달래느라 출근 전부터 그날 써야 할 정신력과 체력이 깨나 고갈된다. 졸음도 가시지 않았는데 나를 차가운 차 안에 던져놓고 움직이지 못하게 안전벨트로 꽉 동여매기까지 하는 엄마가 아이 입장에서는 무척이나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주말에 시간을 내서 함께 타러 나갔던 킥보드를 매일 아침 태워줄 수 있다는 여유를 즐길 법도 한데 나는 그러지 못했다.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핸드폰을 꺼내 드니 시간은 오전 9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회사였다면 빈속에 커피를 한잔 마시고 이제 막 하루를 시작하는 한참 분주할 시간이었다. 그런 시간에 출근용 블라우스가 아닌 티셔츠를 입고 사람들 틈에 섞여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는 상황이 낯설게만 느껴졌다. 내가 이 시간에 회사가 아닌 집 근처에 있다니 정말 이상하다며 남편에게 카톡을 보내고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뉴스에서 연일 열 돔 현상이니 폭염이니 하며 더위에 대한 기사를 내보내던 아직은 여름이라기엔 이른 7월 초 나는 육아휴직을 냈다. 아버지의 질병으로 아이를 돌봐주시던 친정의 도움을 받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나의 아이는 사랑스럽다는 말이 부족한 42개월이고 나의 아버지는 59세에 투병 2년 차 폐암 4기 환자이다.
한참 단풍이 아름다울 10월 부모님은 속리산으로 단풍 구경을 가셨다. 문장대에서 내려오는 길에 어머니는 발을 헛디뎌 발목에 골절상을 입었고 이에 구조헬기를 타고 인근 병원으로 가셨다. 아버지는 속리산 국립공원 직원과 함께 등산로가 아닌 직원들이 다니는 길로 하산하셨는데 그 과정에서 ‘직원들 만큼 산을 잘 타신다’는 이야기를 들으셨다고 한다. 그로부터 한 달 뒤 아버지는 폐암 4기 확진을 받았다. 연락을 듣고 찾아간 응급실에서 아버지를 만났다. 아버지는 응급실 내에서도 중증 환자 구역에 계셨다. 폐와 심낭에 물이 차 있어 천자술을 시행한다고 했다. 물에 가려져 있어 잘 보이지는 않지만 폐에 무언가 보인다고 했고, 조직검사 결과 그것은 암이었다. 작년도 아니고 한 달 전에 문장대에 다녀오신 분이 폐암이라니 현실감 없는 대사를 우리 가족에게 대입시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고통 그 자체였다. 휘영한 기분이 몰려와 내 온몸 구석구석을 감싸기 시작했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두 눈에서 눈물이 뚝뚝 흘렀고 발갛게 충혈된 두 눈 아래로 화장이 번져 나갔다. 그저 현실을 부정하고 눈물 흘리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해 11월 어느 겨울날은 나의 생일이 얼마 남지 않은 날이었고 아버지가 암을 선고받은 날이었다.
전조증상이 전혀 없던 것은 아니었다. 기침으로 불편했던 아버지는 이비인후과를 두 곳이나 찾아갔다. 처음 간 곳에서는 목에 염증이 있다며 감기약을 처방해 주었고 일주일이 지나도 호전되지 않자 아버지는 다른 이비인후과를 찾았다. 그곳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비인후과 두 곳을 다녀도 호전되지 않고 기침이 2주 이상 지속되자 아버지는 내과를 찾아가셨다. 내과에서 청진음을 들은 선생님께서는 대학병원 의뢰서를 써주셨고, 아버지는 그렇게 대학병원 응급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응급실에 가기 위해 택시를 잡으려 교차로로 나가는 100m가 채 안 되는 길을 여러 차례 쉬어가며 걸으셨다고 한다. 병원에 가기 위해 샤워를 하면서도 숨이 차 몇 번을 앉아서 쉬어가며 샤워를 마치고 응급실에 가는 길에도 숨이 차 많이 고통스러웠다고 하셨다. 나중에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혼자 병원으로 향하며 무척이나 복잡했을 아버지를 생각하니 같이 있어 주지 못한 미안함으로 온 마음이 어룽졌다.
아버지가 암 확진을 받고 연이어 며칠 밤을 눈물로 보냈다. 화장실에 몇십 분을 멍하니 앉아 있기도 하고 애꿎은 수도꼭지를 틀어놓은 채 엉엉 울기도 했다. 아버지에게 큰 병이 찾아왔다는 사실에 말로 꺼내지 못할 사무침이 밀려오면 샤워를 하다가도 주저앉아 물줄기에 눈물을 흘려보내곤 했다. 하루아침에 날벼락을 맞은 기분인데 잔인하게도 세상은 전혀 바뀌는 것이 없었다. 나는 꼭 영화 마루 밑 아리에티에 나오는 소인이 된 기분이었다. 인간의 욕심으로 잡혀가 병에 갇혀버린 소인. 나는 엄지손가락 크기의 소인이 되어 500ml 용량의 슬픔의 병에 갇혀있는데 꺼내 달라고 소리치고 울부짖어도 아무도 나의 상황에는 관심이 없다는 듯, 아니 신경 쓸 필요조차 없다는 듯 세상은 무심하리만치 일상의 모습을 유지하며 잘 돌아가고 있었다. 출근길에 꽉 막힌 고속도로 입구를 지나 일터로 가는 길에서 내 곁을 바쁘게 스쳐 가는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캐비닛에 쌓인 서류들을 꺼내어 일을 시작했다. 아버지의 암 소식을 듣고 일하는 첫째 날 오전 일과를 마치고 찾은 구내식당에서 점심 반찬으로 수육이 나왔다. 아버지가 폐암 4기라는데 내가 점심을 먹어도 되는 걸까. 음식을 목구멍으로 넘겨야 한다는 사실에 죄책감이 밀려왔다. 아버지의 몸 곳곳에 암세포가 퍼질 때까지 아무것도 몰랐으면서 어김없이 12시 언저리가 되자 배고픔을 느끼는 내가 역겨웠다. 잘 삶아진 고기와 상추쌈을 맛있게 먹는 동료직원들 사이에서 젓가락으로 고기 몇 점을 뒤적이며 밥 알갱이 몇 알을 오물거렸다. 좀처럼 입맛이 돌지 않았다. 식당에 오기 전 손을 씻기 위해 들른 화장실에서 한껏 울어댄 탓인지 목구멍에 무언가 얹힌 느낌이 들어 계속해서 애꿎은 밥알만 뒤적였다.
“얼른 밥 먹어. 먹어야 힘이 나지.” 같이 밥을 먹던 동료가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누가 내 마음을 조금만 알아주어도 눈물이 터져 나오는 그런 날이 있다. 그가 건넨 작은 위로에 금세 코끝이 찡해지고 시야가 흐려졌다. 모두가 즐거운 마음으로 음식을 즐기는 이 시간에 울어버리는 주책 따위는 부리고 싶지 않았다. 또 한편으로는 가정에 생긴 일로 복잡한 내 감정을 회사에서 드러내기엔 자존심이 상했다. 나는 이내 숟가락을 들고 밥을 크게 한술 떴다. 내 몸속에서 어떻게든 나오려고 발버둥 치는 눈물을 틀어막기 위해 입을 쩍쩍 벌리고 음식을 욱여넣었다. 내가 굶는다고 달라질 것은 없었다. 나는 감정에 휩쓸리기보다 냉정해질 필요가 있었고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내서 집중해야 했다. 일을 마치고 돌아가 무엇보다 소중한 나의 아이를 품에 안아주어야 하고 긴 투병 생활을 시작해야 하는 아버지를 응원해야 한다. 울지 말고 먹자. 지금 내가 할 일은 먹는 일이다. 죄책감이 들고 나 자신이 역겹게 느껴질 지라도 그것이 그 순간 내가 해야 하는 일이었다. 나는 식판에 묻은 마지막 밥알 한 톨까지 깨끗하게 긁어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