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 오늘 퇴근하고 ㅇㅇ이 좀 봐줄 수 있어?"
수화기 너머로 아내의 들뜬 목소리가 들려온다. 항상 집에만 있는 아내인데 멀리 사는 친구가 이 근처에 볼일이 있어서 오랜만에 같이 저녁을 먹자고 했단다. 순전히 남편 직장 때문에 아무런 연고 없이 이 동네에서 살고 있는 아내이다. 마음의 빚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는 자주 없는 기회라 흔쾌히 그러겠다고 말했다.
네 살 난 아이와 함께 아내를 배웅하고, 아내가 양념에 미리 재워둔 치킨을 에어프라이어에 돌렸다. 고소한 냄새를 맡으며 거실부터 주방까지 왕복 달리기 시작! 아파트 1층 주민의 몇 안 되는 특권이자, 요즘따라 밥투정이 심해진 아이의 입맛을 살리기에 딱 좋은 놀이다. 한참을 달리다 주방에 서서 거실 방향으로 멀어지는 아이 뒷모습을 보고 있는데,
"어?"
발이 턱, 걸리더니 아이가 앞으로 고꾸라지는데 위치가 심상치 않다. 아니나 다를까 곧장 터지는 울음소리.
"엄~마~!!"
달려가서 보니 단단한 창틀 모서리에 머리를 찧었다. 혹이 꽤나 볼록하고, 우느라 콧구멍도 한껏 커진 걸 보니 엄살이 아니네. 마음이 쓰리다.
아내가 나간 지 10분이 채 안돼 눈물, 콧물 흘리며 엄마를 찾는 아들을 부둥켜안고 "많이 아팠지~"를 차분하게 반복하지만 마음은 그렇지 않다. 맨날 하는 달리긴데 오늘따라 이게 무슨 일이람. 병원은 안 가도 되나? 밥 먹고 씻고 할 일이 많은데 어떻게 달래지.
서러운 울음소리가 살짝 잦아들 때쯤 냉동실에 있는 아이스크림 생각이 났다. 이 시간에 간식이라니. 하지만 달리 방법이 없다. 오늘도 평화로운 식사는 물 건너갔네.
"아이고, 우리 ㅇㅇ이 머리 꿍해서 찜질을 해줘야겠다."
"응..?"
아이가 어리둥절하며 울음을 그친다. 차가운 아이스크림을 꺼내 혹 위에 얹었다. 앗 차가워, 하며 고개를 드는 아이의 눈빛이 바뀐다. 얼른 까서 달란다.
아이스크림의 달콤함에 아이를 잠시 맡기고 저녁을 준비했다. 치킨 살을 발라 식히면서도 잘 먹으려나 근심이 앞선다. 달리기 덕분일까, 아니면 우느라 힘이 들었던 걸까. 다행히 아빠는 몇 조각 주지도 않고 아이 혼자 접시를 비웠다. 부른 배 덕분에 다친 머리는 잠시 잊고 도란도란 평화로운 시간을 보냈다.
"엄마 왔다~!"
늦지 않게 돌아온 아내가 아이와 부둥켜안고 인사를 나눈다. 우리는 머리에 난 상처를 설명했고 아내는 아빠도, 아이스크림도, 맛있는 치킨도 주지 못했을 엄마만의 위로를 아이에게 건넸다.
"아이구 꿍했어? 많이 아팠겠네~ 호~"
모양은 아빠와 다를 게 없으나 엄마가 아니면 줄 수 없는 그것. 머리는 여전히 볼록했지만 마음에 난 혹은 엄마 품에서 사르르 가라앉았겠지. 아이가 말은 하지 않아도 분명 그랬을 거다. 요즘 조금만 수 틀리면 징징대며 엄마를 찾는 아들을 보자면 아빠는 가질 수 없는 그것이 좀 부럽다. 그래서 우리가 한 가족인 거겠지. 오래 함께 행복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