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광현 Jan 30. 2024

승진 누락한 모범사원


이제는 글로 쓸 수 있는 마음이 되었다.

작년 말, 나는 책임 진급심사에서 떨어졌다.


바쁜 한 해였다. 팀의 체계를 새롭게 정비하면서 개인적으로 감당해야 할 수고가 적지 않았다. 굳이 생색내지 않아도 주변에서 먼저 알아주었다. 한 다리 건너 일하는 동료들까지 “고생이 많다”, “요즘 잘한다더라” 하며 격려를 건넬 땐 기분이 좋았다. 스스로에 대한 평가에 인색한 나도 ‘올해는 그런대로 나쁘지 않구나’ 생각하며 연말에 있을 승진 발표를 은근하게 기다렸다.


드디어 결과가 나왔고, 나는 명단에 없었다. 나열된 이름이 가나다 순인걸 알면서도 혹시 내 이름이 어디 끼어있지 않을까 여러 번 살폈다. 가슴에 큰 돌덩이 하나가 들어찬 것 같았다. 몇 번이고 한숨을 내쉬어 봐도 답답함이 가시질 않았다.


파트장님이 소주 한 잔 하자고 제안했지만 혼자 삭히고 싶다며 사양했다. 초연한 척 대답하고 싶었는데 의지와는 다르게 내 얼굴이 일그러지는 게 느껴졌다. 인정할 수 없다는 마음은 아니었다. 회사를 1, 2년 다닌 것도 아니고, 조직의 결정이라는 게 어떤 것인지 이제는 나도 대충 안다. 그냥 인정하기 싫을 뿐이었다. 그리고 기분이 아주 좋지 않을 뿐이었다.


처음이 아니라는 사실이 나를 더 작아지게 했다. 대리 승진 때도 한 번의 누락이 있었다. 당시에도 사정이 있었고, 이번에도 사정은 있었다. 팀장님은 자신의 무능함을 탓하며 미안함을 전했다. 더불어 조직의 구조적인 문제에 대해 설명해 주셨다. 이전 팀장님까지 연락을 주셔서 그때 고과를 챙겨주지 못해 미안하다며 위로했다.


모두 감사했고,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하지만 내가 제때 승진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함께 입사한 동기들 중 아직까지 책임을 달지 못한 건 어쨌든 소수였다. 앞으로 일을 하며 마주칠 사람들의 마음속 손가락질을 상상했다. 그 사람들이 추측할 나의 어떤 하자에 대해 생각했다. 걱정할 가족들을 떠올렸다. 그렇게 쭈그러든 마음으로 며칠을 보냈다.


그 주 금요일, 평소보다 일찍 퇴근길에 나섰는데 옆팀 팀장님한테서 카톡이 하나 도착했다.


“광현이 안녕, 모범사원 수상 축하. 다음 주 목요일 2시에 본부장님께서 수여하신다~ 일정 참고하셔.”


뜻밖의 소식이 또 한 번 마음을 휘저었다. 그냥 승진이나 시켜주지 하는 볼멘 마음과, 그래도 다음 연도 심사에 도움이 되겠다는 안도감이 복잡하게 교차했다. 이렇게까지 감정이 좌우되는 게 싫었다. 나는 분명 회사원이지만 회사에서 벌어지는 상황과 나라는 사람의 가치를 어느 정도 분리할 필요가 있음을 느꼈다. 조직이 결정한 승진 누락, 모범사원 포상과 상관없이 나의 2023년은 정말 어땠냐는 물음에 대한 답을 찾아야 했다.


“승진하면 좋겠다, 해고되지 않으면 좋겠다. “

“좋겠다, 좋겠다, 좋겠다! “

“미안하지만 희망사항은 계획이 될 수 없다.”


월급쟁이는 ‘희망’하고 부자는 ‘통제’한다는, 연말에 읽었던 책의 구절이 돌아와 마음을 찔렀다. 일 년 동안 얼마나 주체적으로 살았나. 적당하고 쉬운 열심 아래로 도피했던 건 아닌가. 스스로 인정할 만한 성장과 성취를 이루었나. 때가 되면 남이 떠먹여 줄 피동적인 보상을 더 기다렸던 건 아닐까. 회사원으로서 회사 일을 열심히 하는 건 백 번 맞지만, 내 열심은 어디를 향하고 있었을까.


물음에 답하지 못한 채 약속된 목요일을 맞았다. 본부장님이 소감을 묻는 상황을 상상했다. ‘내년에는 좀 더 잘해서 꼭 승진하겠습니다.’ 같은 삐딱한 본심을 내뱉고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이내 머리를 흔들며 털어냈다.


동료들의 축하 속에서 상을 받았고 기념촬영을 했다. 한껏 웃으려 했다. 찍힌 사진을 보니 정리되지 않은 마음이 잘 감춰진 것 같았다. 그래도 역시 상이라는 게, 사람의 기분을 좋아지게 만들었다. 그게 자존심이 상했다. 겉으로는 웃으면서 속으로는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으려고 애썼다. 누가 보면 고약하다 하겠지만 그땐 마음이 그랬다.


자리에 앉아 다시 일에 집중하려는데 메시지가 도착했다. 함께 일하는 후배였다.


“매니저님 축하드려요! 매니저님이 예전에 동료들에게 안전지대가 되는 게 목표라고 하셨었잖아요. 그게 결실을 이룬 거 아닐까요? ㅎㅎ“


그러게, 내가 그런 말을 했었지. 책 <두려움 없는 조직>을 읽고 감명받아 했던 다짐이었다. 모범사원이 실제로 어떤 기준으로 정해졌는지 나는 듣지 못했다. 어쩌면 승진자 결정의 부산물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내 다짐을 다시 상기시켜 준 축하가 참 고마웠다. 적어도 그 후배 한 명에게는 내가 작은 안전지대가 되는 데 성공했구나.


좋은 태도. 지난 한 해는 정말 그것 하나에 열중했다. 진심을 담은 여러 편의 글을 매체에 기고했고, 실제로도 그렇게 행동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 애썼다. 언제든 편하게 다가갈 수 있는 안전하고 따뜻한 사람, 그저 성격만 좋은 사람이 아니라 자기 일에 책임감을 갖고 잘 해내는 사람이 되길 바랐다.


일을 하면서 동료들로부터 받은 격려와 감사 인사가 유난히 많은 한 해였다. 글로 쓰기엔 구차한, 나만 기억할 사소한 장면들이 여럿 떠오른다. 마음의 게으름을 이기고 조금 더 다정했던 대화, 맡겨진 일에 조금 더 몰입했던 어느 밤, 내가 글을 통해 주장한 것들을 행동으로 완성했다고 느낀 값지고 또렷한 순간들. 그것들을 하나씩 그러모으면서 확신했다. 내가 전념한 그 ‘좋은 태도’라는 주제 안에서 나는 일 년 동안 성장했구나. 모두에게, 매 순간 그런 사람은 아니었겠지만 그래도 어제보다는 더 좋은 사람이 되었구나.


정신승리라 말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상관없다. 언젠가 이 기간을 돌아보며 감사하게 될 거라는 예감이 든다. 그저 손으로 밖에 받을 수 없었던 모범사원 포상을 이제야 온 마음으로 받는다. 이 글은 나만의 시상식이다. 2023년도 분투한 나란 사람에게 조금 늦은, 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진심 어린 박수를. 짝짝짝!





매거진의 이전글 목표는 1,000km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