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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광현 Sep 05. 2021

회사가 망해도

고민의 시작



간간히 있는 회사의 조직개편, 누군가의 승진, 직장 내의 가십거리 같은 것들을 활력 삼아 회사 생활의 권태로움을 극복하며 지내던 2018년 겨울. 팀장님이 무슨 교육을 다녀오라고 했다. 주제는 잘 모르겠지만 그저 3박 4일 동안 사무실에 안 나와도 된다는 게 좋았다.

 

경기도 용인 어느 외진 곳에 위치한 연수원에 도착했다. 지급되는 노트와 펜, 일정표를 챙겨 넓은 강연장 한 귀퉁이에 적당히 앉았다. 기조강연이 있다고 했다. 이번 교육을 기획했다는 인재개발원의 어느 부장님이었다.

 

회사가 망해도 여러분은 살아야 하잖아요?

 

강연 중에 들었던 번지수를 잘 못 찾은 거 아닌가 싶은 이 말이 예비군 훈련에 참석한 것처럼 헐렁했던 내 마음을 긴장시켰다. 3박 4일 동안 뭘 하려는 건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정말 다양한 프로그램들이 있었는데 사실 지금은 머릿속에 남아있는 내용이 그렇게 많지 않다. 다만 모든 일정을 관통하는 단 하나의 메시지는 마음속에 선명하게 새겨졌다.


나는 누구인가?

이 한 가지 질문을 강연, 연극, 토론, 여러 가지 모양으로 마주했다. 매 시간 삶에 대해, 죽음에 대해, 나의 마음에 대해 쉬지 않고 물었다. 밖에서 만났다면 왠지 모를 불편함에 '뭐래'하고 피해버렸을 주제겠지만, 일상과 완전히 분리되어 도망칠 곳 없는 이 연수원에서 나는 맨몸으로 이 질문에게 두들겨 맞는 수밖에 없었다. 단단했던 내 마음 어딘가에 금이 가고 있는 걸 느꼈다.

 

교육 마지막 날, 스스로에게 편지를 쓰는 시간이었다. 나는 나 자신에게 사과했다. 3박 4일 내내 받았던 그 무겁고 불편한 질문에 대한 일종의 항복 선언 같은 거였다.


미안하다는 말을 가장 먼저 전하고 싶습니다. 지난 30년 동안 '나에게 돌봄 받지 못했던 나' 스스로에게 사과하고 싶습니다.
 
 첫날부터 마음이 어려웠습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정체성에 대한 질문에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직장인, 남편, 아빠, 아들... 이런 타이틀들을 다 벗어던지면 과연 무엇이 남을까? 외부에서 주어지는 역할들을 다 지우고 나니, 내 마음은 아무런 본질 없이 텅 비어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지금까지 나는 '나'라는 존재를 그냥 방치했구나, 버려두었었구나,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바시 구범준 PD님의 강의가 기억에 남습니다. 당신의 업에서 why를 찾아라. 저는 이 why라는 질문을 항상 두려워하고, 외면해왔습니다. 누군가의, 또는 사회의 요구에 의문을 갖고 멈춰서는 것이 불효로, 또는 불성실로 비치진 않을까 항상 두려웠던 것 같습니다. 지금이라도 이런 고민을 하게 된 것에 정말 감사하고 있습니다. 교육기간 내도록 내 목소리, 내 욕구에 귀 기울이기 위해 애썼습니다.
 
 이제 제 인생의 무게추를 나 스스로에게로 조금씩 옮겨오려고 합니다. 타인에게로 치우쳐있던 균형이 수평을 찾게 되는 날, 나 스스로에게 떳떳하고 자신 있게 "행복하다"라고 말할 수 있는 날이 곧 오게 될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좋은 교육, 인생의 기회를 주신 교육의 과정에 만났던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2018.12.6


살면서 처음으로 나에게 주어진 사회적인 역할이 아니라, 나라는 사람 자체에 대해서 고민했다. 직장생활을 하며 느낀 무기력과 결핍의 출처가 어딘지 이때 알았다. 회사에는 내가 없었다. 아니, 최소한 회사 밖에서라도 나라는 존재를 가져본 적이 있었다면 이렇게까지 마음이 힘들진 않았을 것이다. 나는 연수원을 나서면서 새로운 삶을 다짐했다.



그날 이후로 3년이 지났다. 그 사이 한 번의 승진이 있었고, 예쁜 아이를 낳아 정말 정신없이 키웠다. 직업과 직장은 그대로다. 나의 정체성을 찾겠다고 회사를 뛰쳐나와 새로운 공부를 하거나 창업에 도전하는 드라마틱한 일 같은 건 없었다.

 

다만 변한 게 있다면 무언가 자꾸 해보려는 사람으로 바뀌었다는 거였다. 사회적으로 주어진 역할들을 빼고는 스스로가 어떤 사람인지 단 한 줄도 설명하지 못하는 나의 상태를 빨리 벗어나야겠다고 생각했다. 소소한 일들을 이것저것 경험하면서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어떤 것에 관심이 있는지 같은 나에 대한 작은 이야깃거리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
누군가에게 자신을 어떻게 소개하는가?


오랜 시간 외면해 온 자신의 정체성을 하루아침에 발견하는 일은 쉽지 않은 것 같다. 마음만 앞선 나의 서투른 의지와 기대는 생계라는 현실 앞에서 금세 빛을 잃곤 했다. 나는 조바심 내지 않고 그저 저 가벼운 질문에 대한 답을 한 줄씩 늘려가기로 했다. 그것이 "나는 누구인가"라는 그 철학적이고 무거운 문제의 답에 한 걸음씩 가까워지는 현실적인 방법이라고 믿으면서.


나는 조금 특별한 계기로 이런 고민을 하기 시작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내 주변에는 항상 많은 기회들이 있었다. 책 한 구절, 좋은 영상 한 편, 누군가와의 대화, 또는 일상 속 평범한 선택의 순간들이 끊임없이 내가 누구인지를 묻고 있었다. 오늘도 나를 어제보다 조금 더 반짝이게 해 줄 짧은 이야기 한 줄을 더하기 위해, 자꾸만 모로 눕는 낡은 안테나를 한 번 더 바로 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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