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작은 한 단어로부터
새로운 아이디어는 의외로 '글'에서 출발해요. 프로젝트를 맡으면, 스타일링을 관통할 '단어'나 '문장'부터 잡는다고요. 평소 눈에 띄는 단어와 글을 기록해 놓기도 해요.
- 세븐도어즈: 푸드에서 공간까지 '스타일리스트'의 정의를 넓히다 (by 롱블랙)
롱블랙에서 이 노트를 읽자마자 떠오른 프로젝트가 있었다. 조금 오래된 일이긴 하지만, 10 꼬르소 꼬모와 휠라의 콜라보 제품을 준비할 때 제일 먼저 떠올린 건 하나의 키워드였다.
엘리베이터.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엘리베이터라는 갇힌 공간, 좁은 공간 안에서 화보를 풀면 생각보다 심플한 콜라보 아이템들을 더 강렬하게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엘리베이터라는 하나의 키워드를 시작으로 슬로건도 바로 나왔다.
Elevate your look
이 한 줄의 문장을 시작으로 핀터레스트에서 레퍼런스를 찾고, 내가 원하는 것들이 정리된 촬영 기획안을 대행사에 넘겼다. 대행사는 그 기획안을 바탕으로 촬영준비에 들어갔고 이후 모든 순서가 순조롭게 진행됐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난 참 하고 싶은 게 명확했고, 광고주라는 이유로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아서 감사했다.
그렇게 나온 화보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 밖으로 나왔고, 10CC 청담에서도 가장 메인 사이트에 우리의 아이템들이 소개될 수 있었다.
수십 번도 넘게 작업했던 화보촬영은 매번 어려웠지만 유독 이 때는 준비부터 리터칭까지 쉽고 가볍게 흘러갔던 것 같다. 론칭 직후 반응도 좋아 주요 사이즈는 품절이 났고, 물량을 더 찍었던 기억도 난다. (아 그리워라 그때...!)
대단한 전략이나 기획은 생각보다 심플하게 시작된다. 좀처럼 풀리지 않는 생각들도 한 개의 단어나 한 줄의 문장을 찾고 나면 미끄러지듯 풀릴 수 있다. 물론, 그게 사진 한 장일 수도 있다. (그래서 마케터들에겐 핀터레스트가 마르지 않는 샘일 수밖에 없다. 고마워요 핀터레스트!)
"모든 브랜딩의 시작은 단어라고 생각해요. 만화를 보다가, 책을 읽다가, 꽂히는 단어가 있으면 꼭 수집해 둬요. 단어는 구체성을 만들어 주거든요. 예를 들어, '초록색이면 좋겠다'는 말보다 '초록색 이끼였으면 좋겠다'는 말이 더 구체적 오라(aura)를 만들죠. '원형들'이란 단어에 조화, 균형, 안정감이란 가치가 깃든 것처럼." - 원형들: 고수 맛, 이끼 모양 케이크. 힙지로부터 레드벨벳까지 사로잡다 (by 롱블랙)
패션업계에서 금융이라는 척박하고 낯선 땅으로 와 발 붙이고 산 지 2년을 훌쩍 넘긴 요즘, '내가 제대로 일하고 있나?' 하는 마음이 들어 불안했던 게 사실이다. 금융인이 되어서도 이렇게 떠오르는 단어 하나를 영감 삼아 기획하고 방향을 잡는다는 게 옳은 일인가 하며 고뇌하기도 했었다(ㅎㅎ). 그런데 최근 접한 네임드 피플들의 간증(?)을 통해 내가 일해온 방식이 틀리지 않았단 생각이 들어서 참 다행이고 감사했다.
본격적으로 시작된 내년도 사업계획 시즌을 맞이해 다시금 마음을 다잡아 본다. 시작은 미약하나 끝은 창대하리라는 말처럼, 미약해 보이나 분명하고 뾰족한 하나의 단어를 통해 창대한 전략이 실행될 수 있음을 믿어본다.
내일은 떠오를까?
내년을 위한 한 단어... (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