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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ather Oct 17. 2018

보장된 미래

노인을 위한 나라도 청년을 위한 나라도 없다.



퇴근길, 방배역 3번 출구로 들어가기 전 늘 만나는 할머니 한 분이 있다. 굽은 허리가 원래도 작은 키를 더 작게 보이게 만드는 그 할머니의 손에는 휘트니스센터의 프로모션을 홍보하는 전단지가 들려 있다.


나는 웬만하면 그 전단지를 받으려고 노력하지만 앞 사람과의 거리, 할머니가 내게 전단지를 건네시는 타이밍에 따라 받지 못하는 날도 많다. 그렇게 할머니를 그냥 스쳐지나가는 날에는, 괜히 마음이 쓰여 지하철을 타고도 얼마간은 그 할머니 생각을 한다.



할머니의 사연은 무엇이길래 저렇게 굽은 허리로 매일 밤, 곧 버려질 전단지를 나눠주고 계신걸까.



어제 퇴근길에도 어김 없이 할머니가 길가에서 전단지를 나눠주고 계시는 게 보였다. 하지만 가열차게 집으로 향하는 회사원의 발걸음이라는 게 생각보다 빨라서, 내 몸은 이미 할머니를 지나친 뒤 였고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나는 굳이 후진을 해서 할머니 손에 들린 전단지 한 장을 잽싸게 받아들었다.



돌아가신 외할머니를 꼭 닮은 모습의 그 할머니에게 전단지 한 장의 의미는 크지 않겠지만, 내일을 살아갈 희망이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얼마 전 읽은 김혜진의 장편소설 <딸에 대하여> 에는 이런 문장들이 나온다. 숨을 죽이고 몇 번이고 다시 읽었던 문장들. 나와 엄마의 이야기인 동시에 미래의 나와 내 딸의 이야기가 될.



끝이 없는 노동. 아무도 날 이런 고된 노동에서 구해 줄 수 없구나 하는 깨달음. 일을 하지 못하게 되는 순간이 오면 어쩌나 하는 걱정. 그러니까 내가 염려하는 건 언제나 죽음이 아니라 삶이다. 어떤 식으로든 살아 있는 동안엔 끝나지 않는 이런 막막함을 견뎌 내야 한다. 나는 이 사실을 너무 늦게 알아 버렸다. 어쩌면 이건 늙음의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이 시대의 문제일지도 모르지. 이 시대. 지금의 세대. 생각은 자연스럽게 딸애에게로 옮겨 간다. 딸애는 서른 중반에. 나는 예순이 넘어 지금, 여기에 도착했다. 그리고 딸애가 도달할, 결국 나는 가닿지 못할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아무래도 지금보다는 나을까. 아니, 지금보다 더 팍팍할까.



살아있는 동안엔 어떤 식으로든 삶을 걱정해야 하는 삶. 그러고보면 인간은 늘 죽음이 아니라 삶을 고민하고 삶으로 고통 받는 존재인 것이다.



어떻게 먹고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하면 잘 살 수 있는지를 아무리 궁리해도 죽기 전까지 그 답을 찾지 못할 수도 있는 존재.



100세 시대, 고령화 시대를 지나 진짜 고령시대를 살게 된 우리에겐 우리의 부모들이 그랬던 것보다 더 많은 삶에 대한 고민이 요구될 것인데, 나는 앞으로 어떤 삶을 살게 될까.


초등학생 때는 ‘이렇게만 열심히 하면 서울대 갈 수 있어.’ 라고 착각했고 고3 때는 ‘나도 대학 가면 예뻐지고 살 빠지고 연애할 수 있어’ 라고 오해했다.


하지만 올해 서른 둘, 나는 더이상 ‘내가 늙으면 완벽한 노후 준비 덕분에 돈 걱정 없이 행복하게 여행이나 하다가 어느 날 잠든 듯 죽을거야.’ 라고 착각하지 않는다.


헬조선 이라고 불리우는 대한민국에서 30년 이상을 살았으면 그런 세상 물정 모르는 기대 따위는 기대 할 수 없으니까.


개천에서 용 나는 건 오래 전에 전설이 되었고, 부를 되물림 받은 사람들만이 부를 또 물려줄 수 있는 바톤터치의 시대가 되어버린 대한민국. 노후 준비는 커녕, 결혼 준비도 할 수 없어서 결혼을 포기하는 사람들. 일자리를 구할 수 없어서 구직활동 자체를 포기하는 사람들. 그 와중에 낙하산 채용은 만연한 사회. 죄를 지어도 돈이 있으면 당당하게 무혐의로 풀려날 수 있는 자본의 나라.



그런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전단지를 돌릴 수 있는 기회와 기운이라도 남았다면 감사해야 하는 걸까.



나와 같은 신혼부부들이 아이를 낳지 않는 이유도 우리가 그 아이의 미래를 보장해 줄 수 있다는 확신이 없기 때문인데, 이런 불안감은 정말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떨쳐내야만 하는 숙제가 되어버린 기분이다.


생각해보니 지금이 내 인생 최고의 전성기 일지 모르겠다. 잘 나가는 회사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는 자주 오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몇 년이 지나고 삼십대 중반의 ‘김지영’이 된 이후의 내 삶은? 글쎄. 모르겠다.


나는 계속 열심히 살 것이고, 잘 살기 위해 고민하고 고군분투 할 각오가 되어 있지만 그것만이 내 미래를 보장해주지는 않으니까.


정말, 우리에게 보장된 미래란 무엇일까.



모두가 함께 잘 사는 나라, 노인이 되면 적어도 밤의 거리에는 나오지 않아도 되는 나라는 여기에 없는 걸까.




할머니의 전단지를 집까지 들고 와서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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