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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ather Oct 24. 2018

“맛있게 읽었습니다.”

술상 대신 책상을 차리다.



우리 모두의 집에는 읽지 않은 책이 수십 권, 수백 권 혹은 수천 권 쌓여 있을 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결국 언젠가 한 번쯤은 그 책들을 펼쳐 보게 되고 그것들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 책의 우주, 움베르토 에코


정확히는 책을 읽는 것보다 책을 사는 것을 좋아하는 나는, 움베르토 에코의 말을 위안 삼아 올해도 여러 권의 책을 샀다.


좁은 집에 마땅히 책장 놓을 공간도 없어서 바닥에 차곡차곡 쌓아둔 책들. 어느덧 13.5평의 이 작은 공간에도 ‘책의 우주’가 생겼다. 하지만 이 우주엔 중력이 존재함으로, 모든 책들은 바닥에 누워 나의 손길을 기다린다. 이쯤 되니 조금 읽는 척하다 덮어버린 수많은 ‘읽다 만 책들’에게 눈치가 보인다.


편협한 독서 취향을 바꿔보려 나름 다양한 분야의 책들을 샀는데, 결국 손에 잡히고 끝까지 읽히는 건 내 취향의 책들이다.


그렇게 짬이 날 때마다 책을 읽었고, 책을 읽을 땐 늘 술상을 차리듯 ‘책상’을 차렸다. 책을 읽을 땐 맛있는 것도 함께여야 한다는 지론을 바탕으로.


그렇게 한 권, 두 권 읽어나갈 때마다 새롭게 차려진 나만의 책상들. 술이 술술 넘어가듯 책도 술술 읽혔으면 좋았을 텐데 늘 깨끗하게 끝을 보는 건 책이 아니라 책과 함께 차려진 음식이었던 것 같다.


올해를 겨우 두 달 정도 남겨두고 그동안 내가 차린 책상과 내가 읽은 책들을 살펴본다. 그리고 가장 맛있게 읽었던 책들을 꼽아본다.



단연코, 내 맘 속 1등 <경애의 마음>
체리를 씹으며 읽다.


왜 이 책에 끌렸는지는 모르겠지만, 누군가의 마음에 대한 이야기를 읽고 싶었던 것 같다. 가진 자가 아니라 가지지 못한 자를 대변하는 경애와 상수의 역사가 담긴 책. 이 두꺼운 책을 좋아라 읽고는, 나 혼자 읽기 아깝다는 생각에 팀원들에게 일방적으로 읽어보라고 건넸던 ‘함께 읽고 싶은 책’.


누구를 인정하기 위해서 자신을 깎아내릴 필요는 없어. 사는 건 시소의 문제가 아니라 그네의 문제 같은 거니까. 각자 발을 굴러서 그냥 최대로 공중을 느끼다가 시간이 지나면 서서히 내려오는 거야. 서로가 서로의 옆에서 그저 각자의 그네를 밀어내는 거야.



나도 <진작 할 걸 그랬어>
보리차를 들이켜며.


아나운서 김소영보다 오상진의 와이프로 유명했던 그녀가 ‘당인리 책 발전소’를 오픈하며 책방 주인으로 데뷔했을 때 참 멋지다고 생각했다.


아나운서보다 책방 주인이 더 잘 어울리는 그녀가 미국, 일본 등지의 다양한 책방을 여행하며 써 내려간 이야기. 우울할 때면 서점에 가서 마음을 달래던 나와 같은 이에게는 마치 힐링 에세이.


한때는 더 많은 대중 앞에 선 나를 상상했고, 촌철살인의 멘트와 카리스마를 내뿜는 앵커를 꿈꿨다. 그러나 화장기 없는 얼굴로 서점의 간이 의자에 앉아 있는 지금의 나는 아주 행복하다. 꿈이 소박해졌거나 욕심을 내려놓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열댓 명의 사람들 앞에서 오히려 무릎을 탁 치고 가슴을 울리게 만드는 이야기가 생겨난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검열이 없으니 가릴 것도 없고, 생선회처럼 팔딱팔딱 뛰는 이야기를 들을 수도 있다. 나는 그런 이야기들을 세상에 전달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앞으로 내 삶에 또 다른 깨달음의 순간이 올지도 모른다. 방송인, 책방 주인, 혹은 그 무엇이 되더라도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묻고 싶다.



내가 좋아하는 거실에서
내가 좋아하는 토마토를 먹으며 읽었다.
<좋아하는 곳에 살고 있나요?>


독립을 한 이후로 나는 내 공간을 크기와 상관 없이 열심히 가꾼다. 그림의 위치를 바꿔가며, 꽃을 사나르며 말이다.


‘공간 디렉터 최고 요의 인테리어 노하우’라는 부제와 예쁜 표지, 무엇보다 나에게 묻는 듯한 질문을 담은 제목까지. 안 살 이유가 없었던 책이다.


공간 관련 일을 하면서 “나중에 내 집이 생기면, 돈이 더 모이면, 좋은 집에 이사 가면...”으로 시작되는 이야기를 수없이 들어왔습니다. 하지만 ‘이곳이 아닌 곳’에서 ‘언젠가’ 행복하게 살겠지, 라는 생각보다 지금 내가 사는 집에서 행복할 방법을 찾아보는 건 어떨까요? 꿈에 그리던 그 집, 지금 사는 집에서 최대한 비슷하게 이뤄보는 거예요.



감자칩에 콜라가 아니라 커피?
<매거진 B ‘인스타그램’ 편>


인스타그램에 하루 수십 번도 더 들어가는 것 같다.


2011년, 한국에선 아직 인스타그램이 생소하던 때부터 사진을 올리기 시작한 내 기준에서 인스타그램은 2018년 현재까지 끊임없이 변모해왔다.


정방형의 사진을 올리는 프레임은 그대로지만 끊임없이 새로운 기능이 추가되었고 그 덕분에 인스타 스토리를 통해 실시간으로 내가 있는 곳의 풍경과 소리, 분위기를 공유할 수 있다. 좋아하는 이의 인스타 라이브를 시청하며 하트를 날리기도 하고.


언젠간 인스타그램도 싸이월드처럼 잊힐 수 있겠지만 현재로써는 가장 막강한 소셜 플랫폼임에 틀림없다.


인스타그램의 디자인을 총괄하는 그(이언스폴터)는 인스타그램이 대중으로부터 꾸준한 호응을 얻는 비결은 서비스 본래의 가치와 사용자 경험을 유지하면서 사용자와 시대에 맞춘 변화를 발 빠르게 도모하는 균형 잡힌 자세라고 말한다.


맥주가 당기는 독서
<마케터의 일>


마케터라는 이름으로 8년 차, 벌써 그렇게나 시간이 흘렀다. 그런데도 아직 내가 무얼 하는 사람인지 모르겠어서 샀다. (우리 부모님도 내가 무얼 하는지 정확히 모르신다) 지나온 내 파란만장한 세월이 떠올라 울지도 모르니까 핑계 삼아 와사비콩과 맥주를 차려놓고 읽었다.


여전히 마케터라는 건 이런 거다, 하고 정의할 수 없지만 흔들릴 때마다 길잡이가 되어 줄 책을 만났다.


상품 제공자의 인격과 소비자의 인격을 넘나 듭시다. 마케터는 회사 내에서 우리 상품에 가장 심드렁해야 합니다. 동시에 우리는 우리 상품을 누구보다 깊이 알고 우리 브랜드를 누구보다도 좋아해야 합니다. 기획자만큼 깊이 알면서 소비자만큼 얕게 보는 일, 좋아하는 동시에 심드렁한 자기 분열 상태를 유지하는 것, 어려워 보이지만 마케터가 가져야 할 이중인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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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행은 작게 짧게 빠르게. 과감하게 그리고 디테일하게. 철저하게 공들여서 차근차근해야 하는 일도 있지만, 마케터에게는 작게 시작해서 짧게 던지고 빠르게 해야 하는 일이 훨씬 많습니다. 일단 빨리 해보고 괜찮으면 보완하면서 확대하고, 아닌 것 같으면 얼른 줄이거나 끝내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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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달의 민족 광고도 하는 것마다 잘되지는 않았습니다. (중략) 마케팅 캠페인도 늘 빵 터지는 걸 목표로 준비라지만 잘될 때도, 안 될 때도 있습니다. 준비를 잘하면 터지고 부족하면 안 터지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죠. 이번엔 꽤 잘 준비했다고 생각해도 실제 공개하기 전에는 터질지 안 터질지 잘 모릅니다.



탄산수 중독자의 독서
<이탈리아 디자인 산책>


올여름은 유독 탄산수에 빠져 있었다. 맹물을 어떻게 마셔? 하면서 계속 탄산수를 마셨다. 책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 (이탈리아산 천연 탄산수였다면 좋았으련만 국내산 가짜 탄산수만 주야장천 마셨다)


이탈리아가 실력 있는 디자이너들에게 보내는 신뢰와 존중, 기회를 부러워하며 읽은 책. 내가 디자이너라면 당장 이탈리아로 달려갔을지도.


이탈리아 디자인이 세계 최고라 불리는 것은 디자이너의 뛰어난 역량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디자이너의 다양한 개성을 존중할 줄 알고 참신한 디자인을 위해 기술적인 실험과 지원을 아끼지 않는 이탈리아 회사의 열정 덕분이기도 하다. 그리고 디자인 실명제처럼 디자이너들을 직접적으로 뒷받침해주는 정책 차원의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탈리아 디자인 산업의 단단한 뿌리가 되어주는 이러한 토대가 오늘날 세계 각국의 디자이너들이 이탈리아로 몰릴 수밖에 없는 이유다.



도넛은 달고 인생은 쓰다
<검사 내전>


그냥 검사가 뭐하는 사람인지 궁금했던 것 같다. 최순실 사태를 겪으며 법이라는 걸 다루는 자들의 생활이 궁금했고 그 세계에 대해 알고 싶었던 것 같다.


필력 좋은 검사님 덕분에 재밌게 읽어 내려간 책.

바보 같게도 나는 그에게 살다 보니 세상이 다 사기 같다고 말했다. 영민 씨 같은 사람에게 세상은 더욱 그렇다고 했다. 청년에게 희망을 주라는 말도 사기라고 했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 자식들에게 희망이 아니라 특혜를 준다. 청년에게 위로를 건넨다는 교수나 종교인도 정작 관심은 돈에 있는 것일지 모른다. 정의와 법치주의를 부르짖는 검찰도 대한민국에서 벌어지는 거대한 사기의 주연 일지 모른다. 어쩌면 개처럼 일하는 형사부 검사들의 선의와 신실함이 이 사기의 가장 화려한 기술로 악용되었을지 모른다. 그래서 세상은 늘 영민 씨 같은 사람들의 시간과 노력과 기대를 훔쳐 가는지 모른다.


여전히 사놓은 책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완결한 책의 수. 그 와중에 좋은 책들을 꽤나 많이 읽었다.


앞으로도 맛있는 책 읽기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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