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먹는 일, 생각보다 괜찮다

서른을 지나 마흔으로 가는 길

by Heather

20대 초반엔 자랑할 게 '젊음' 밖에 없었다.


스물둘, 인턴이라는 걸 처음 시작한 회사에서 나는 사내에서 가장 어린 직원이었다. 그것만으로 - 외모나 몸집, 애티튜드와 상관없이 - 많은 분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할 수 있었고, 매일 밥과 커피를 얻어먹었다. 그러다 금방 애매한 이십 대 중반을 만났고, 서러운 이십 대 후반도 지나 보냈다. 기어이 서른이 온 것이다.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 살은 온다.
시큰거리는 치통 같은 흰 손수건을 내저으며 놀라 부릅뜬 흰자위로 애원하며.
- 최승자 <삼십 세> 중


서른을 앞둔 어느 해, 최승자 시인의 '삼십 세'라는 시를 읽게 되고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당연히 잘 살 거라고만 생각했던 서른이라는 나이가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온다니. 어릴 땐 서른이 되면 당연히 내 집도, 차도 있을 거라는 허무맹랑한 꿈을 꿨었는데 말이다.


그렇게 집도 절도 없는 채로, 잘 사는 법도 잘 죽는 법도 모르는 채로 서른을 보내고 이제 내 나이 서른둘이다.


올해도 다 갔으니 두 달만 지나면 서른셋이 된다(어이쿠). 팀에서도 팀장님과 차장님 다음으로 가장 나이가 많은 선임이 됐고, 어딜 가나 '누나'와 '언니' 소리 듣는 게 당연한 나이가 되었다.


독주를 각자 한 병씩 비워갈 무렵, 한참을 침묵하고 있던 선생님이 말을 시작했다. "사는 게 낯설지? 또 힘들지? 다행스러운 것이 있다면 나이가 든다는 사실이야. 나이가 든다고 해서 삶이 나를 가만두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스스로를 못살게 굴거나 심하게 다그치는 일은 잘하지 않게 돼."
선생님의 이 말은 당시 나에게 큰 위로가 되었던 것은 물론이고 이후에도 삶의 장면 장면마다 불러내는 말이 되었다.
- 박준 <운다고 달라질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중


박준의 산문집을 읽다가 접어둔 몇 장의 페이지 중에 이런 글이 있었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다행스러운 것이라는. 정말 맞는 것 같다. 이십 대 중반의 사회초년생이었던 나는, 작은 실수 하나 용납하지 못하고 고객사의 컴플레인이 있는 날은 하루 종일 풀이 죽어 있었다. 당시 나를 데리고 계셨던 상무님이 하셨던 말씀이 생각난다.


"오래 끌어안지 말고 잊어버려. 누구나 실수할 수 있는데 왜 그렇게 자책하니. 그러지 마."


하지만 끝내 난 그 미련스러움을 떨쳐내지 못했고, 몇 년이 더 지나고 나서야 (회사생활의 쓰디쓴 맛을 더 보고 나서야) 평정심이라는 걸 찾았다. 마케팅이라는 일이 언제나 기획 당시의 목표와 방향대로만 흘러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예상만큼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을 수 있는데, 이제야 그 사실을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게 됐다.


이제 곧 삼십 대 중반이 될 것이고, 금방 마흔이 올 것 같다. 예전엔 나이 드는 게 정말 싫었지만 이젠 흘러가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싶다. 나의 늙어감을 응원하면서. 그리고 나 어릴 때처럼 젊다고 유세 떠는 친구들에게 한마디 해주고 싶다. 나도 너희 나이일 때가 있었어. 니들도 나이 먹거든? 너무 유치한가. 그냥 그렇다고.


한창 블로그를 열심히 할 때, '시는돈이다' 라는 이름의 게시판을 만들어 시 저금(적음)을 한 적이 있었다. 여러 권의 시집을 읽으며 좋은 시들을 닥치는 대로 적어보자, 라는 생각으로 시작했지만 얼마 못 가 끝나버린 저금의 열정. 아이러니하게도 이십 대 중반에 시작했던 그 게시판의 첫 게시글이 바로 안도현 시인의 '마흔 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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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서른을 꿈꿨던 26살의 내가 왜 이 '마흔 살'이라는 시를 제일 먼저 적었을까. 시와 내 감상평을 몇 번이나 다시 읽어본다. 결코 마흔을 꿈꾼 적 없다는 솔직한 고백이 적혀 있는 과거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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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이 나는 먹을 만큼 나이를 먹었다. 소낙비처럼 허둥대기도 하고, 세상의 입에서 욕도 '겁나' 나오게 하고, 먹고 싶은 건 다 먹어야 된다는 욕심으로 몸을 불려 가며 말이다. 안도현 시인의 말처럼, 꾸역꾸역 살아왔던 시간들로부터 조금 더 자유로워질 수 있는 (외로워질 수 있는) 마흔을 맞이할 수 있을까?


어느 모임의 저녁 자리에서 연세가 지긋한 한 분을 만났을 때의 일이다. 시작은 역시 같은 질문이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그분의 말은 달랐다. "제가 잘은 모르지만 한창 힘들 때겠어요. 적어도 저는 그랬거든요. 사랑이든 진로든 경제적 문제든 어느 한 가지쯤은 마음처럼 되지 않았지요. 아니면 모든 것이 마음처럼 되지 않거나. 그런데 나이를 한참 먹다가 생각한 것인데 원래 삶은 마음처럼 되는 것이 아니겠더라고요. 다만 점점 내 마음에 들어가는 것이겠지요. 나이 먹는 일 생각보다 괜찮아요. 준이 씨도 걱정하지 말고 어서 나이 드세요."
충격이었다. 자신의 과거를 후회로 채워둔 사람과 무엇을 이루었든 이루지 못했든 간에 어느 한 시절 후회 없이 살아냈던 사람의 말은 이렇게 달랐다.
- 박준 <운다고 달라질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중


무엇을 이루었든 이루지 못했든 간에 어느 한 시절을 후회 없이 살아냈던 사람. 박준 시인도 그와 가까운 사람이 되고 싶다고 썼다. 나도 그럴 수 있다면 좋겠다. 마흔엔 무조건 성공할 거야, 라는 목표를 향해 달리다가 그 목표를 이루지 못하면 지나온 모든 삶을 송두리째 '실패했다'라고 말하게 될 것 같다. 그저 지금보다 조금 더 넉넉한 마음으로 조금 더 담담하게 살아갈 수 있다면 좋겠다. 스물을 지나 서른이 될 때까지 많은 일들을 겪으며 꾸역꾸역 쥐고 있던 것을 내려놓는 법을 배웠다. 마흔엔 분명 지금보다 더 나아져 있을 것이고 나이를 먹어야만 알게 되는 것, 갖게 되는 것이 있다고 믿는다. 젊음은 정말 부럽고, 멋진 자랑거리지만 나이를 먹는다는 것도 꽤나 멋진 일이라는 걸 느낀다. 이래저래 불안하고 안타까운 사건사고가 많은 2018년 10월, 지금 이 순간도 조금씩 나이를 먹고 있는 우리의 앞으로가 지금보다 더 괜찮았으면 좋겠다.


+

좀 전에 한 기사를 통해 '빌거'라는 말이 요즘 초등학생 사이에서 유행이라는 글을 읽었다. '빌라에 사는 거지'를 가리키는 말이라고. 그들의 말대로라면 나도 '빌거'인 것이다. 우리나라가 어쩌다 이렇게까지 되었을까. 내가 초등학생일 때는 적어도 아파트에 사는지, 빌라에 사는지로 사람을 판단하지는 않았는데 말이다. 말 그대로 미래의 기둥이 될 초등학생들이 벌써 부모의 소득 수준으로 부자와 거지를 정하다니 결국 그런 의식을 갖게 한 건 가진 자들의 부모들일까? 아직도 후진국에 머물러있는 우리의 의식 수준은 언제쯤 개발도상국이라도 될지 모르겠다. 제발 우리 모두 더 괜찮은 어른이 되었으면 좋겠다.



KakaoTalk_Photo_2018-10-29-00-12-19.jpeg 동생에게 빌린 책인데 재미있게, 유익하게 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