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yse, Autograph Collection이 준 차이나는 경험들
회사에서 만난 동갑내기 친구들과 올해부터 계를 시작했다. 돈이 어느 정도 모이자 돈 쓸 궁리를 하게 됐고, 그러다 연말 송년회 겸 호캉스도 즐길 겸 향한 곳이 라이즈 오토그래프 컬렉션(Ryse, Autography Collection)이다. 호텔 이름 치고는 참 길고 어렵지만 그래서 더 유명세를 얻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은 곳이다.
라이즈 오토그래프 컬렉션(이하 라이즈 호텔)은 올 3월 홍대에 생긴 신상 호텔이다. 세계 최대 호텔 그룹인 메리어트 인터내셔널에서 전개하는 브랜드로 아마 다른 나라에도 속속 생겨나고 있는 중인 것 같다. 많은 호텔에 다녀본 건 아니지만 이 호텔이 마케팅을 하면서 늘 입에 달고 사는 '경험'이라는 키워드를 어떻게 호텔 비즈니스에 활용해야 하는가를 제대로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 때문에 글을 쓰게 됐다.
요즘 읽고 있는 책인 <지적 자본론>은 1983년 츠타야 서점을 연 뒤 현재는 1400개가 넘는 츠타야 매장을 운영하는 컬처 컨비니언스 클럽 주식회사(CCC)의 최고 사장 겸 CEO인 마스다 무네아키가 츠타야의 성공 비결과 앞으로의 비즈니스는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가를 적어 내려 간 책이다. (많은 마케터와 디자이너 사이에서 꼭 읽어야 할 책으로 꼽힌다)
기존의 가전제품 양판점은 상품에 따라 구역을 나눴다. 텔레비전 구역, 냉장고 구역, 에어컨 구역, 세탁기 구역... 다양한 기업의 여러 가지 기종을 모아 놓고 고객의 선택을 유도하려면 이 방식이 효율적이었을 것이다. 단, 거기에 '제안'은 없다. 기껏해야 '설명'이 존재할 뿐이다. "기종 간의 차이는 설명해 줄 테니까, 나머지는 당신이 알아서 선택하라."라는 자세다. 이래서는 인터넷상의 매장을 이길 수 없다. 상품을 갖춘다는 측면에서 인터넷이 훨씬 더 우위에 놓여 있다는 사실은 이미 설명한 대로다. 실제로 아마존은 전체 규모에서 볼 때, 나카노 구의 면적과 거의 비슷한 크기의 창고 공간을 확보하고 있다. 따라서 매장에 진열할 수 있는 상품 구성이라는 측면에서, 오프라인 매장은 도저히 인터넷 상점을 압도할 수 없다.
그래서 CCC는 매장을 라이프 스타일을 제안해 주는 형식으로 재편했다. '영화를 즐긴다.', '집에서 생활의 여유를 맛본다.', '소통을 창출한다.'... 이렇게 주제별로 구분된 구역 안에서 보다 구체적인 제안을 실행하고 그 제안을 가능하게 하는 가전제품을 상품 분류 기준을 초월해 진열한다. 즉, 제안하는 라이프 스타일에 필요한 상품만 진열하는 것이다.
그의 설명대로라면 츠타야는 더 이상 서점이 아니다. 2년 전 다이칸야마 츠타야 서점에 갔을 때 실감했다. 그곳에선 책 그 이상의 것들을 팔고 있었고, 라이프 스타일을 제안하는 디스플레이를 실현하고 있었다. 어느새 일본을 대표하는 브랜드가 된 츠타야의 비결은 고객의 삶 곳곳에 침투하여 그들이 보고 싶은 것을 보여주고, 그들이 제안받고 싶은 것을 제안한 것이 아닐까.
라이즈 호텔에서 내가 받은 인상도 그와 다르지 않았는데, 분명 기존에 가봤던 호텔들과 어떤 차이가 있었다. 그 차이나는 경험들이 무엇이었는지 소개한다.
(이해를 돕기 위해 최근 몇 년 사이 내가 가본 호텔을 나열해보자면 뉴욕 Row NYC, LA The Line Hotel, 인천 네스트 호텔, 강릉 씨마크 호텔, 강남 소설호텔, 부산 하운드 호텔 광안 등이다. 이 호텔들 역시 기존 정형화된 호텔의 이미지를 벗어나 아트와 컬처, 시대의 트렌드가 결합된 복합 문화공간으로써 작용하여 많은 인기를 얻고 있다.)
1. 호텔 직원들은 유니폼을 입지 않는다.
강추위에 얼어버린 손으로 호텔 로비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환하게 인사를 해주는 라이즈 호텔 직원들의 편안한 착장, 사실 처음엔 호텔 직원이 아닌 줄 알았다. 칼하트의 비니와 운동화, 옷도 단정하게 무채색의 컬러로 맞추기는 했지만 트렌디하고도 캐주얼했다. 호텔 프런트 직원들의 착장도 마찬가지. 캉골 버킷햇을 쓰고 있는 한 직원의 환한 미소가 눈에 띤다. 큰 링 귀걸이를 하고 있는 직원의 미소에서도 친절함이 느껴진다.
우리가 흔히 접하는 호텔 직원들의 복장은 양복이나 투피스로 된 유니폼이다. 뉴욕 한복판에 위치한 부띠끄 호텔에서도, LA에서 제일 인기라는 호텔에서도 직원들의 복장은 검은색 수트였다. 그런 의미에서 라이즈 호텔 직원들의 복장은 내겐 정말 새로운 경험이었다. 물론 그 캐주얼 자체가 유니폼일 수 있지만 말이다. (실제로 각 층에서 일하는 직원분들도 Ryse가 프린트되어 있는 편안한 복장을 입고 있었다)
2. 강남이 아닌 홍대에 문을 열었다.
한국에 생긴 부띠끄 호텔들은 주로 강남 쪽에 있는 것 - 호텔 카푸치노, 소설호텔 등 - 같은데 라이즈 호텔은 독특하게 홍대 중심부에 문을 열었다. 홍대의 대표적인 약속 장소인 홍대입구역 9번 출구에서 5-7분 정도만 걸으면 된다. 실제로 라이즈 호텔은 이 홍대 지역의 지역적/문화적 특성을 고려해 호텔 곳곳을 구성했음을 강조한다. 아래는 라이즈 호텔 홈페이지에서 캡처해온 호텔 소개글이다.
호텔의 말대로, 이 곳에 묵는 잠깐의 시간 동안 여러 예술작품들을 곳곳에서 마주했다.
3. 샌프란시스코에서 온 유명한 베이커리의 커피와 빵을 먹을 수 있다.
이 호텔을 알게 된 건 우연히 #홍대카페 를 검색하던 중이었다. 한남동에 문을 열어 핫해진 타르틴 베이커리가 홍대에까지 진출했고, 이 호텔의 1층에 위치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라이즈 호텔을 알게 된 것이다. 라이즈 호텔 홈페이지에 가보면 이런 글이 있다.
"커피 한 잔이 주는 여유가 필요한가요? 미국 샌프란시스코 타르틴 베이커리의 갓 구운 빵을 판매하는 호텔 1층의 커피 바에서 홍대의 활기찬 거리를 풍경으로 커피를 즐겨보세요."
그렇다. 라이즈 호텔의 말대로, 이 곳에서는 탁 트인 유리창을 통해 홍대의 활기찬 거리를 감상할 수 있다. 너무 추운 날엔 오래 앉아있기 쉽진 않을 것 같지만, 날 좋을 땐 친구들과 만나 수다도 떨고 홍대 거리를 걷는 사람 구경하기에도 참 좋을 것 같다.
4. 호텔 안에 편집숍이 있다.
같은 회사에서 만났지만 4명 중 2명은 올해 퇴사를 했다. 남은 건 나와 다른 한 명 D. D는 오늘 오후 반차를 낸 상황이라 넷의 출발지는 모두 다르다. 덕분에 로비에서 도착하는 대로 모이기로 한 상황, 내가 두 번째로 도착해 먼저 도착해 있는 D를 찾는다. 옷을 참 잘 입고, 옷을 참 좋아하는 D는 호텔 프런트 반대편에 위치한 가게에서 옷을 구경하고 있었다. 호텔에 옷가게가 있다는 게 신기했지만 자연스럽게 매장을 둘러본다. 멋진 인테리어는 물론이고 칼하트, 반스, Brixton, Obey 등 옷 좀 입는 사람들이라면 모두 알 법한 유명 브랜드들의 제품들이 모여있다. 알고 보니 1-3층까지 Worksout의 플래그십 스토어가 자리해 있었다. 덕분에 친구들을 기다리는 게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이 옷 저 옷, 이 모자 저 모자 등을 살펴보며 '아 이건 좀 사고 싶네' 하는 찰나 나머지 2명의 친구들이 합류했다. 그리고 그 2명마저 쇼핑의 늪에 빠져버렸다는...
물론 요즘 호텔에는 쇼핑할 수 있는 굿즈샵이나 작은 편집숍들이 많이 생겨나고 있지만 이 정도의 규모로 쇼핑이 가능한 곳은 못 본 것 같다. 여행지에 오면 괜히 더 쉽게 지갑을 열게 되는 여행객의 마음을 간파당한 기분이 들었다.
5. 지하에 갤러리가 있다.
제주도에 가면 꼭 들러야지 하고 한 번도 못 가본 아라리오 갤러리가 라이즈 호텔 지하 1층에 있다. 지금은 중국을 대표하는 유명 실험영화감독인 '쥐 안치'의 영상을 전시하고 있었는데 이해하기 쉽지는 않았지만 이런 영화감독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는 것 만으로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호텔의 설명에 따르면 아라리오 갤러리 라이즈 호텔 지점은 조금 더 혁신적이며 실험적인 전시들을 소개하는 데 주력하는 전시 공간이라고 한다. 다음 날 아침 조식을 먹고 나와 호젓하게 갤러리 곳곳을 둘러보는 경험도 흔치 않지만 즐거운 경험이었다.
이 곳에 묵는 1박 2일 동안 느낀 경험 또 하나는 직원들이 기분 좋은 친절함을 베푼다는 것. 그동안 다녔던 호텔에서는 훈련된, 계약된 친절을 제공받는 것 같았지만 라이즈 호텔 직원들의 친절함은 '진심에서 우러나는 게 분명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늘 먼저 인사해주고 말을 걸어주었다. 아쉽게도 엘리베이터의 오작동과 화장실 변기 수압(?) 등 시설에 대한 약간의 아쉬움이 있기는 했지만 충분히 그런 불편함을 감수하고도 좋았던 곳이다.
만약, 나와 같이 호캉스의 기회가 생긴다면 라이즈 호텔에서의 1박을 추천한다. 물론 내가 말한 대부분의 공간은 호텔에 묵지 않아도 누구나 즐길 수 있다고 하니 마케팅을 하는 사람이라면 꼭 한 번 둘러보시길 바란다. 우리가 늘 말하던 '멋진 경험'은 이렇게 만들어지는 것이구나, 하고 느낄 것이다.
이제 마케팅을 의미 있게 만드는 건 경험이 전부 일지도 모르겠다.
+ 친구들과 묵었던 에디터 룸. 4인 패키지가 있어서 샴페인과 과일도 제공받았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