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있다. 드라마 주인공이긴 하지만.
작년 여름에 써둔 글을 브런치 서랍에서 발견했다. 이 사진 한 장을 빼고는 모두 delete를 눌러 삭제했다. 몇 개월 사이 많은 것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또렷하게 생각나는 그 날의 기억은 이 한 장의 사진 덕분일지도 모르겠다. 중국집에 모여 밥을 먹다 받은 후배의 결혼식 청첩장. 봉투엔 후배를 닮은 예쁜 글씨로 후한 메시지가 적혀 있었는데 그 내용이 무지 맘에 들어서 부끄러운지도 모르고 사진을 찍어 남겨뒀다.
작년 여름 방영한 드라마 'www 검색어를 입력하세요'는 내 열 손가락 - 최애 드라마가 너무 많은가 - 안에 드는 최애 드라마 중 하나다. 현실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직장생활 롤모델이 여럿 출연하는 작품인데 특히 임수정 배우가 분한 '배타미' 역할은 당시 점점 늘어가는 후배들에게 '어떤 선배가 되어야 할까?’ 하던 내 고민에 멋진 정답을 제시해주는 캐릭터였다.
6개월 안에 경쟁사를 제치고 시장점유율 1위를 달성하겠다는 자신감, 회사 카페에서 일하는 알바생의 명석함을 눈여겨봤다가 이직하게 된 회사에 스카웃해 데려가는 용기, 남자 후배의 성 정체성을 단정 짓지 않고 '여친 있어요?' 대신 '애인 있어요?'라고 묻는 배려와 같은 것들이 내가 그녀에게서 닮고 싶은 것들이었다.
특히 가장 기억에 남는 대사는 이거다.
"20대는 돈이 없잖아요. 사회 초년생들이 왜 무리해서 명품 백을 사는지 알아요? 가진 게 많을 땐 감춰야 하고, 가진 게 없을 땐 과장해야 하거든요. 이 사회가 그래요. 투쟁할 수 없으면 타협해요."
회사의 중요 프로젝트 건으로 함께 미팅을 나갔다가 미팅 상대에게 자존심을 크게 상한 어린 후배에게 자신의 명품백을 주며 하는 대사인데, 돈이 없던 나의 20대 시절 - 물론 지금도 없다 - 이 떠올라서 더욱 공감이 됐다.
잠깐, 나에게도 배타미 같은 선배가 있었던가?
많은 선배들의 얼굴이 스쳐간다. 저렇게 명품백을 쥐어준 선배는 없었지만 - 그럴 일도 없었지만 - 내게 전화 잘 받는 법, 메일 잘 쓰는 법, 퇴사하는 후배를 멋지게 응원하는 법을 알려준 선배들은 있었다.
(물론, 저렇게 되지/늙지 말아야지 했던 케이스들을 훨씬 많이 만났다.)
그렇담 나는 지금까지 어떤 선배였을까?
10년 차가 되고 나니 참 많은 후배들이 내 인생을 스쳐갔다. 좀 더 빨리 일할 수는 없냐고 재촉하기도 했고 이렇게밖에 못하냐고 핀잔을 주기도 했었는데. 그래도 난 인복이 있어서 착한 후배들을 많이 만났다. 그들이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준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하나 더. 나를 한번 더 참게 하고, 한 달 더 버티게 한 건 줄어들 생각을 않는 대출원리금과 신용카드대금이었다. 지금도 여전히 나를 일하게 하는 원동력... 나의 롤모델 배타미 역시 이별보다 무서운 게 카드값, 대출이라고 했다.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아라 : 20대는 밤이 아깝답니다. 출근할 곳 있어야 행복은 한데 출근하기는 싫어요.
타미 : 그건 30대도 똑같답니다.
아라 : 헐. 그럼 어떻게 해요?
타미 : 똑같아. 다음 달 카드값 생각해야지.
아라 : 아, 그렇지. 신용카드라는 게 참 무섭더라고요.
타미 : 맞아. 진짜 무서운 건 이별 같은 게 아니지, 카드값, 대출이자 그런 거지.
직급이 없는 스타트업으로 온 지 한 달 하고도 반이 지났다. 이젠 더 이상 누군가의 선배로 불릴 일도, 후배가 될 일도 없지만 좋은 직장인,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은 여전히 그대로다.
수많은 캐릭터를 가진 사람들과 함께 일하며 팀워크, 조직생활이라는 것을 배우는 건 엄청 힘든 일이지만 동시에 즐겁고 짜릿한 일이기도 하다. 10년 가까이 회사생활을 하며 느낀 건 내가 사람을 무척 좋아한다는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동료가 되고 싶고, 내가 속한 조직에 필요한 조직원이 되고 싶다. 이 간절한 마음이 나를 더 멋진 직장인으로, 어른으로 만들어주길 바란다.
타미: 어릴 때요, 서른여덟 살 정도 먹으면 완벽한 어른이 될 줄 알았어요. 모든 일에 정답을 알고 옳은 결정만 하는 그런 어른. 근데 서른여덟이 되고 뭘 깨달은 줄 아세요? 결정이 옳았다 해도 결과가 옳지 않을 수 있다는 거. 그런 것만 깨닫고 있어요.
브라이언: 마흔여덟 정도 되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요? 아 이거 스포일런데. 옳은 건 뭐고 틀린 건 뭘까? 나한테 옳다고 다른 사람한테도 옳은 걸까? 나한테 틀리다고 해서 다른 사람한테도 틀리는 걸까? 내가 옳은 방향으로 살고 있다고 자부한다고 해도 한 가지만 기억하자. 나도 누군가에게 개새끼일 수 있다.
타미: 너무 큰 스포라 뛰어내리고 싶네요.
브라이언: 근데 스포가 미덕도 있어요. 재미는 없어지지만. 그래도 모르고 당하지는 말자. 그냥 알아둬요.
타미: 그래도 전 아직 어려서 그런지 항상 옳고 싶어요. 내가 맞았으면 좋겠어요.
브라이언: 좋네요. 그 간절함이 타미를 좋은 곳으로 데려갈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