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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ather Dec 16. 2020

오늘도 참 잘 살았다!   

우리 모두 스스로에게 이렇게 얘기해줘요. 


드디어 집 안에 처박혀 매일 미동도 없이 일하는 재택근무 생활에 권태를 느낀다. 내가 무의미한 인간이 된 것만 같다. 이 추위에 따뜻한 집에서 재택근무하면서 월급도 따박따박 받는데 도대체 무슨 일이지? 이게 코로나 블루인가? 오늘은 마음이 참 이상한 날이다. 


기념일 계산길로 재택근무 한지 얼마나 됐는지 계산해보니 오늘로 28일 차. 물론 2번 정도 회사에 나가긴 했지만 집에서 일한 날짜만으로도 한 달을 꽉 채워가는 중이다. 매일 1-2번씩 화상 미팅을 하고, 필요한 것들을 찾고, 아이디어를 떠올리고, 자료를 만드는 일상. 나름 바쁘게 지나가는 하루지만 별다른 아웃풋이 없어서일까? 괜히 조바심이 나기도 하고 잘하고 있는 건지 불안하기도 하다. 


펑퍼짐한 추리닝 바지에 질끈 묶은 파마머리, 더 이상 시력이 나빠지는 걸 막기 위해 쓴다지만 참 안 어울리는 뿔테 안경. 동네에서 알아주는 백수가 된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그래도 아메리카노는 마셔야 하니 가끔 누추한 모습으로 외출을 한다. 나름 옷 사는 것도 좋아하고 챙겨 입고 다니는 것도 좋아하는데 그럴 일이 없으니 쇼핑도 흥이 나지 않는다. (이건 재택근무의 순기능! Let's save money!) 


아침에 일어나 세수를 하고 나의 커다랗고 하얀 테이블에 앉아 맥북을 켠다. 회사에서 준 맥북프로는 정말 좋다. 이 좋은 노트북으로 뭔가 더 해야 될 것만 같은데 나 잘하고 있는 걸까? 


생각해보니 재택근무를 하며 바뀌는 건 오로지 이 테이블에 오르는 음식이다. 매일매일 다른 음식을 시켜먹으니까. 움직임이 이렇게 없는데도 매일 끼니마다 배가 고픈 게 신기하다. 먹고 싶은 게 있다거나 식욕이 왕성한 건 아니지만 배가 고파서 먹을 수밖에 없다. 게다가 나의 회사는 재택근무를 하는 직원들에게도 점심값을 챙겨준다. 


재택근무를 하면서 얻게 된 타이틀이 있다. 배달의 민족 VIP. (말로만) 고마운 분이었던 나였는데 재택근무를 하면서 귀한 분이 됐고 곧 더 귀한 분이 될 것 같다. 회사에서 귀한 인재가 되는 건 어렵지만 배민에게 귀한 분이 되는 건 생각보다 쉽네? 


재택근무 기간이 길어질수록 코로나가 우리의 일상을 바꿔놓았다는 말이 피부에 와 닿는다. Zoom이 뭔지도 몰랐는데 매일 같이 Zoom으로 화상회의를 하고, 마트나 식당에 가지 않아도 무엇이든 집 앞에 금세 도착한다. 얼마 전부터 시작한 런드리고 서비스도 매우 만족하며 이용 중이다. 내가 다니고 있는 회사 역시 오프라인 매장에 가서 옷을 사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새로운 생각과 기술로 앞으로의 세상을 예측하고 준비했던 기업들에게 코로나는 오히려 기회가 된 것이다. 


나는 어떨까? 빨라진 변화의 흐름에서 잘 살아가고 있는 걸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든 하루였던 것 같다. 체감상 하루 100 보도 걷지 않는 것 같은 하루의 연속, 엉덩이가 무거워진 만큼 더 생산적으로 무언가 만들어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고 느껴 어깨가 축 쳐진 하루였던 것 같다. 한 선배의 카톡 프로필에 몇 년 전부터 변하지 않고 쓰여있는 말이 있다. 


애매모호함을 견디는 것이 어른이다. 


그 애매모호함을 견디는 것이야말로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인걸. 


퇴근을 하고 영하의 날씨를 느끼고 싶어 밖으로 나갔다. 하루 종일 따뜻하게 데워진 집에만 있어서일까. 별로 춥지 않은 기분이었다.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걷다 집에 들어와 바쁘게 집안일을 하고 다시 자리에 앉아 집어 든 책. 나를 위한 챕터가 기다리고 있었네? 


목적지에만 진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 인생을 중요한 이벤트가 있는 순간과 그렇지 않은 순간으로 구분하고 나머지 날들을 '아무것도 아닌' 시간들이라 치부하지 않는 것. 내게 필요한 건 그런 것이었다. 생각해 보면 삶의 시간이 다 그렇다. 대학에 합격하기 전, 취업하기 전, 이런 식으로 시간을 나누어 놓고 그 전의 시간을 다 '준비' 시간으로 여기면 우리 앞에 촘촘히 놓여 있는 시간이 불행해질 수밖에 없다. - <평일도 인생이니까> 중


이 구절을 읽고 나니 지금의 회사에 입사하기 전 봤던 2차 면접 때가 생각난다. 면접관이 내게 단점을 물었을 때 했던 말이 떠오른다. 


"결과를 너무 중요시 여기는 게 저의 단점입니다. 열심히 준비했던 과정이 있는데도 과정에 만족하지 않고 좋은 결과가 나와야만 한다는 강박을 가지고 있어서 늘 준비했던 프로젝트가 론칭하기 전에는 잠을 잘 못 자는 것 같습니다." 


과정보다 결과를 중요시하는 것은 분명 나의 단점이다. 목표, 결과 물론 정말 중요하지만 그걸 향해 달려가는 과정이 만족스럽다면 그걸로 충분히 '잘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나는 지금 애매모호한 준비의 과정을 견디는 중이고, 나의 하루는 매일매일 소중하고 의미 있다는 걸 잊지 말아야겠다. 


  물론 삶에는 그냥 흘러가는 시간도 있다. 기다리거나 견뎌야 하는 시간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게 결코 버리는 시간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일이다.  
 잎을 다 떨군 나무에게 겨울은 버리는 시간일까? 벚나무는 꽃이 지고 난 뒤 사람들이 무슨 나무인지도 몰라주는 나머지 세 계절을 버리며 살까? 그렇지 않다. 나무는 나무의 시간을 살 뿐이다. 벚나무는 한 철만 살아 있는 게 아니라는, 인생은 수많은 월화수목금토일로 이루어져 있다는 당연한 사실을 깨닫기 위해 그 주말 나는 꽉 막힌 도로에서 봄의 한나절을 지켜보았는지도 모르겠다. 
- <평일도 인생이니까>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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